생각났다. 얼마전 일이

저녁 징소리가 울리기 전에 나무랑 보리랑 늘 그렇듯이 야구를 하다가 (셋이서 하는 야구는 정말이지 재미있다. 한명은 투수, 한명은 수비, 한명은 타자) 기숙사에서 식당으로 향하던 새날이랑 선웅이 모습을 보고 문득 선웅이가 괜찮은 공을 던질 것 같아서 새날이를 타자로 세우고 선웅이한테 공을 던져 보라고 했었다.
                                                                   <밀집모자 쓴 뒷모습이 나>

초반에는 좋은 공을 던지더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바로 엉뚱한대로 공을 던졌던 일이 생각났다. 이윽고 저녁징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은 더 하고 싶다고 했지만 피곤한 나는 밥 먹고 더 하자고 하면서 놀이를 마쳤다.

밥을 먹고 이어서 야구를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때 말고도 나무랑 보리랑은 야구를 많이 했다. Y가 Y의 축구 교실이라고 해서 초딩들이랑 축구를 많이 했다. 나는 야구를 좋아하는데, 야구를 잘 모르던 아이들이 나랑 야구 몇 번 하더니 즐거워 하길래 종종 야구를 했다. 빵꾸난 테니스 공에 청테이프를 둘둘 감아서 만든 공으로 많이 놀았다.

그냥 점심을 먹고 갑자기 이때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어쩌면 사진은 (기록은) 아주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지금이 나쁜건 아닌데, 그냥 점심을 먹고 갑자기 이 사진 속의 순간이 생각났다.
이 사진을 찍은 손님도 누군지 기억이 난다.

지금이 나쁜건 아닌데, 그냥 점심을 먹고 하늘을 보다가 갑자기 이 사진이 생각났다.

사진이 먼저 생각나고, 사진 속의 순간이 생각나고, 이때가 생각난 순서가 맞겠지만
지금이 나쁜건 아니기 때문에 상관 없는 듯도 하다.
AND

20090705 - 6월의 하늘

사진 2009. 7. 5. 00:23







6월은 정말 바빴다. 내가 논을 매던 어느날 참시간에 이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볼 때 당신이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올초 분명히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았고 발빠라이소의 길들과 우수아이아의 하늘도 함께 바라보았었는데.......

한없이 미안하다.
AND

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을 변산에 내려와서 읽게 되었다. 정말 훌륭한 분이시고 두고두고 읽고 싶은 훌륭한 책이다. 아주 인상적인 부분을 통으로 옮겨 본다. '영원히 부끄러울 전쟁' 이라는 산문의 일부분이다.

아무것도 감춰진 것이 없어 차라리 전쟁은 인간의 가장 정직한 행동을 그래도 보여주는 살아있는 연극일지 모른다.

전쟁만 없고 폭격만 없었다면

나는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신문 연재소설에서 시장 바닥에서 파는 삼류 대중 잡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고 있었다. 내 소년 시절은 눈과 귀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였다. 완전히 잡식동물이 되었던 것이다.

음식도 그렇다. 요즘도 누가 뭘 먹고 싶은 것이 없느냐고 물으면 언뜻 대답을 못한다. 음식에 대한 미각도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야 하는데 나는 병을 앓으면서도 절대 음식투정을 해보지 못했다. 무엇이나 그게 그런 맛으로 먹을 뿐이다. 입는 옷도 그렇고 잠자리도 아무데나 쭈그리고 누우면 잠이 든다.

<양철북>이란 영화의 주인공 소년 오스카는 성장을 거부하면서 어른들의 작태를 계속 주시하는데, 나는 일찍 체념한 탓인지 쓰레기장에서 그 쓰레기처럼 함께 묻혀 사는 쪽이 더 편했다. 오히려 깨끗한 것이 불편하고 싫다. 깨끗한 것이란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불신해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지난 날 어두웠던 그림들이 끝도 없이 스치고 간다. 일본 도쿄 시부야의 좁은 골목길에 모여 살던 사람들, 세상에 빈민이란 말만큼 성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하늘을 마음대로 쳐다본다.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빈민들이 살던 골목길엔 국경도 없고 인종 차별도 없다.

찐동야(광대)집 딸이었던 하나코 누나와 시장 모퉁이 삼류 영화관에 가는 즐거움, 빈터에서 어둡도록 숨바꼭질 하면서 놀던 애들, 오시카사마 신사에 축제가 있는 날은 야시장도 함께 열린다. 온 동네 애들이 몰려가서 공짜로 모든 것을 구경했다. 꽃밭처럼 환한 칸델라 불빛과 거기 펼쳐놓고 파는 물건들, 1전씩만 가지고 가면 대나무로 만든 딱총 하나씩은 살 수 있다. 누나들은 밤 12시가 넘도록 기다렸다가 군고구마를 떨이로 사온다.

전쟁만 없었고 폭격만 없었으면 가난한 그 동네에 평생을 살아도 좋았을 게다.

가끔은 나도 변산공동체에서 평생을 살아도 좋았을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이 대목이 가장 내 마음에 끌렸던 것은 단지 변산에 내려온 이후에 잘 씻지도 않고 살면서도 행복한 내 마음을 권 선생님의 마음과 비슷한 것으로 미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이됐든 간에 정말 좋은 책이다.
AND

정확하게 일주일이 지나면 내가 처음에 정말로 지랄같은 곳이라고 하더라고 버티는 기분으로 있자고 생각했던 변산에서의 3개월을 맞이한다. 아주 좋은 사람들이 많은 시기에 이곳에 내려와서 쉬기도 많이 쉬고 놀기도 많이 놀았다. 물론 일도 많이 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독립해서 근처에 사는 식구들 얘기는 한결같이 6, 7월은 일이 힘들어서 사람들도 날카로워 지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는데, 그 분들도 내 얘기에 동의 하는 지점은 지금이 공동체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고 날을 세우는 사람들이 없는 시기라는 점이다. 나는 이런 좋은 시기에 이 곳에 내려와서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런 좋은 시절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던 한 친구가 엊그제 서울로 떠났다. 본인의 말로는 일이 힘들었다거나 누군가와의 다툼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전에 서울에서 하던일에 계속 미련이 남아서라고 한다. 나는 당연히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곳을 떠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자기 얘기를 실컷 할 수 있는(나로 친다면 지후나 고구미 영일군) 친구가 이곳에 없었다는 점도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과 함께 그가 떠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는 점이다.(물론 나는 당연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떠나는 것이 맞는 진행이 아니겠는가 라고 그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 현재 공동체 식구들 대부분이 사람이든 일이든 스스로가 견딜 수 있는 울타리를 크게 쳐 두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건 어쩌면 내 얘기인지도 모른다. 내 또래의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기 보다는 초등학생, 중학생들과 신나게 놀고 그 중에 몇몇에게는 하고 싶은 얘기도 다 하고 있다. 아마도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선을 넘어서는 대화를 이곳의 젊은 사람들과 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너무 예쁘다. 

어제 오후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어서 5시에 새벽일을 잡아서 고구마와 들깨를 심었다. 다 심고 점심을 먹고 나니 비가 쏟아졌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오늘 오전에 후딱 해치운 모내기를 했어야 했는데, 나는 제발 비가 많이 오기를 바랐다. 확실히 6월의 일이 힘들어서인가 대부분의 작업들에 덤덤한 나도 많이 지쳤다. 그래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비 소식을 기다렸다가 고구마를 심은 이유는 고구마를 심고 바로 비가 오지 않으면 일일이 물을 떠와서 물을 줘야하기 때문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곳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농사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비가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은 나는 가장 일손도 많고 사람들끼리 다투는 일도 적은 행복한 시기에 이 곳에 내려온 곁다리 식구인 것인데................
요즘 사람들도 편해지고 일도 익숙해져서 인지 말이 조금은 많아져서 걱정이다. 어제 정말 오래만에 쓰는 일기에서 이런 걱정을 여러차례에 걸쳐 쓴 것으로 봐서 곁다리 멤버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로 오래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지후가 많이 보고 싶은 것 말고는 항상 즐거운 진행이니 과음과 그에 이어지는 말들을 조심하면서 계속해서 즐겁게 지냈으면 한다.

곁다리~ 오늘 식구들끼리 보리 심었던 자리에 모내기를 했다. 식구들이 워낙 많아서 후딱 끝났다. 나는 모내기때 모도 잠깐 심고 주로 못줄을 잡았다.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모를 심을 수 있도록 논의 넓이에 따라서 줄을 당겼다 풀었다 하면서 팽팽하게 당겨주는 일이다. 내가 "어이~`"라고 외치면서 줄을 뒤쪽으로 옮기면 사람들이 또 겁나게 모를 심는 식이다. 올해만 벌써 네 번째 손모내기를 하다보니 일이 정말 많이 익는다. 경철이 형이라고 이 동네에서 오래 농사 지으신 형님이 나한테 모 잘 심는다고 칭찬해 주셔서 살짝 기분이 좋았다.  장마 전에 되도록 많은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6월 5일부터 정말이지 바빴다. 덕분에 기장을 제외한 모든 밭작물을 다 심었고 앞으로는 논과 밭을 매는 일이 주가 될 것 같다. 6월의 땡볕을 맞으면서 논에 웃거름을 주고 보리를 베고 탈곡하고 콩과 팥과 옥수수와 고구마를 심는 일, 삽으로 밭 두둑을 잡는 일은 정말 힘들다. 그렇지만 맨발로 잘 갈린 밭에 들어가서 메주콩을 심는 일은 꽤나 즐거웠다.

결국은 익숙해졌을때 사람들을 대하는 일과 내가 하는 말들을 조심하자는 얘기가 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포스팅~~
내일 또 비가 온다고 하니 비 오기 전에 참깨를 옮겨 심어야 해서 오후에는 참깨밭 일을 할 듯 하다. 언제나처럼 즐겁게 일하고 깔끔하게 담배 한대를 피울 준비가 되어있다.
AND

백초즙 - 정양

2009. 6. 2. 18:03
초여름 산길에서 풀 뜯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내 또래쯤 되는 것 같다
백초즙(百草汁)을 담그려고 풀을 뜯는다고 한다

콩알 백 개 헤아려 품에 넣고
풀 한 무더기 뜯을 때마다 쉼표처럼
콩알 하나씩 그 자리에 놓으면서
품안에 콩알 다 없어질 때까지
아무 풀이나 보이는 대로 뜯는다는데

풀 한 가지에 한 소쿠리식 백 소쿠리를
항아리에 삭혀 우려낸 그 백초즙이
묵은 해소도 가슴애피도 소갈증도
몰매 맞은 삭신도 다 풀려버리는
명약 중의 명약이라는데
이렇게 아무 풀이나 뜯다가
독초라도 섞이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못난 사람 못된 사람 다 소용 닿듯이
맛만 보아도 대번에 숨이 넘어가는
소문난 독초들이 섞여야 더 약이 된다며
나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할머니는
두어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다

못난 풀 못된 풀 모진 풀
짓밟아도 뜯어내도 다시 돋는
모질고 모진 꿈들아

할어미의 풀짐을 메고 화끈거리며
할머니의 굽은 등을 따라간다
못난 풀 못된 풀 다 소용에 닿는,
아무 풀이든 한 데 섞이어
명약이 되는 그 이치가 풀짐보다 더 무겁다


서울에 잠깐 올라와서 '변산에서' 태그를 쓰자니 좀 거시기하다.
정양 시인 고향이 김제여서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를 읽다보면 변산쪽이랑 왠지 통하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공동체에서는 희정이 형이 매일 4시 30분에 일어나서 특별한 일이 없는한 온종일 백초효소를 담그기 위해서 풀을 뜯는다.
오늘 엄마한테 잠깐 다녀왔는데, 피부가 좋아졌다고 했다. 나는 아마 먹는 것이 좋아서 그런것 같다고 했다.
백초즙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백초효소를 거의 매일 마셔서 그런것 같다.
시의 마지막 연은 크게 와 닿지는 않는데, 백초즙을 만드는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어서 시집을 변산에 두고 두고두고 읽고 있는 시 중에 한 편이다.  

포스팅을 하면서 다시 읽으니 못난 사람 못된 사람이 다 소용 닿는 곳이 내가 생각하는 마을 공동체의 모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못된 사람은 싫고 못난 사람으로 소용이 닿고 싶다. 일테면 경운기 운전도 서투르고 밭일도 남들보다 잘 못 하더라도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할 때나 단순히 힘쓰는 일이 있을 때, 내가 공동체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AND

20090601 - 하늘들

사진 2009. 6. 1. 14:41


얘가 근영이 - 잘 찍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누구 말대로 프레이밍이 이상하다. ㅡ.ㅡ;







AND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생활을 하는데도 특별한 위화감이 없다.(잠은 따로 자기 때문일까? ^^; ) 지난주에는 조금은 우울한 날들도 있었는데, 지후는 항상 보고 싶고 동생이 문자로 '잘 안돼 얼른 집에와서 같이 준비하자'고 하기도 한데다가 내려온지 한달만에 식사 당번을 단독으로 맡아서(평균적으로 한 달 정도면 식사당번을 맡는다고 한다.) 수요일 점심과 금요일 저녁을 책임지면서 받은 막중한 스트레스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20여 명이 먹어야 하는 밥과 반찬을 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더군다나 아이들도 있어서 더 부담된다.) 이번주도 식사당번이 제일 걱정이구나 일단 수요일 점심은 고사리와 김치국... 그리고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금요일은 저녁이니까 생선 넣은 탕을 끓이면 되고 추가로 나물 두 가지가 필요하다. 아침먹기 전에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몸을 놀리면 쑥갓과 상추, 시금치를 지금 딸 수 있다. 재수가 좋은면 내 밥때에 맞춰서 취나물을 뜯는 일정이 잡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침을 일곱시에 먹는다는 거....ㅡ.ㅡ; (내려와서 한 달 조금 넘는 동안 저녁시간은 30분 늦춰졌고, 아침 시간은 30분 당겨졌다.) 수요일은 내일 모레니까 수요일 오전에 생각해야겠다.

어제 지후랑 한참 통화했다. 나는 기분좋은 술자리를 마치고 취했는데, 수화기 너머로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일을 마음이 아팠다.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내려오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내 마음이 만든 벽 때문에 조금 힘들어졌다.

오늘은 비도 오지 않는데, 특별한 일이 없어서 오랜만에 자유시간(초코바 이름 정말 잘 지은 듯...)이 주어졌다. DS와 통화했는데, 오늘 내일 논다고 내려오겠다고 했다. 별 생각없이 그러라고 했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DS가 자고 갈 곳도 없고 오늘은 자유로운 날이고 친구가 찾아왔으니 잠깐 밖에 나가서 저녁 좀 먹고 오겠습니다라고 나 보다 이곳에 내려온 것이 오래된 식구들에게 말하기가 조금 거시기 해서 풀어놓은 산양과 소를 우리에 넣고, 닭 모이도 줘야하는 등의 일로 DS의 방문을 거절해버렸다. 그런데 모처럼의 휴식을 맞아서 몇몇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전주영화제에 가 보겠다고 나갔다.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 내가 아직은 모든일에 미숙하고 배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남들이 봤을 때, 튀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자는 마음의 벽을 만들어 버려서 지후에게는 섭섭한 남자가 DS에게는 섭섭한 친구가 돼버렸다. 막상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게 주눅들어 있는 것은 아닌데(실제로는 무척이나 즐겁다.) 마음 한 구석에 그런 찝찝함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 스스로에게 조금 거시기 하다. 그래서 정말 보고 싶을 때는(물론 아주 주요한 농사일과는 겹치지 않는 선에서) 지후를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런 대화들이 있었다.
S누나와의 대화 - 일은 재미 있어요? 재미 있습니다 재미 없으면 계속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재미 없어도 있을 수는 있지.
I형과의 대화 - 설령 도피하는 기분으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하루하루가 즐거우면 되는거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것은 아니지만 농사를 짓고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작은 아버지는 아이템을 정해서 내년에 내려오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몸과 마음을 농민으로 단련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이곳에서는 밥도 주고, 담배도 주고, 술도 주고, 정통(?) 유기농을 배울 수 있는데다 아이들이 있어서 즐겁고 소년, 소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도 너무나 즐겁다. 그리고 나는 어떤일이든 순간순간 충실한 기분이 되어서 열심히 하고 있다. 이런 즐거움들과 함께 이곳에 있다가 올해 농사가 끝나고 내년이 되면 나는 강릉으로 갈 수도 있고(나는 강릉땅이 좋다.) 이곳에 남을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도시생활을 할 수도 있다. 또 내년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장 누군가와의 극심한 트러블로(가능성 극히 낮음) 오늘 저녁에 이곳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해서 삶의 방향을 잡고 있는 중이다. 지후야 그러니까 천천히 생각하자.

지난주에 가장 즐거웠던 일 - 이곳에서 소를 한마리 키우는데, 암소이고 이름은 문근영이다. 내가 담당자는 아닌데, 하늘에서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고 근영이 담당자가 보이지 않길래 영주(9살아니면 10살이다.)랑 근영이를 풀 뜯어 먹으라고 매어 둔 곳까지 달려가서 말뚝에 묶어놓은 줄을 풀고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근영이를 끌고 돌아오는데, 비를 처음 맞아보는 근영이가 당황했는지 겁나게 달리기 시작해서 천천히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를 근영이 목에 맨 줄을 잡고 영주와 함께 신나게 뛰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기분 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파란 하늘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많이 즐거웠다.

어제 살짝 당황했던 일 - 어제 머리를 감았다. 머리는 정말 감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때만 감기로 했기 때문에 며칠만인지도 모르겠다.(내려와서 머리감은게 어제부로 세번째다. 물론 속옷은 그 보다는 자주 갈아입는다.) 그런데 대야에 머리를 담궜던 첫물에 기름이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반 모래반으로 변해있는 것이었다. 모래가 잔뜩 묻은 양말을 빠는 기분으로 머리를 빨았다. 흙의 소중함을 아직까지는 잘 모르지만 천천히 알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날그날 충실하게 살자. 

AND

지난달의 어느날 비가 막 쏟아지기 직전에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서 바라본 하늘이 이러했다. 나랑 꽤나 절친한(나는 그녀를 일륜차에 태워주고 밥그릇도 씻어주며 그녀는 가끔 스카치 캔디를 한 개씩 내게 건네는 가운데 밤마다 막걸리도 자주 함께 마시는 관계라면 절친한걸까?) 16세 소녀 친구가(내게는 소녀 친구가 있다. ㅡ.ㅡ) 그날의 하늘을 '대포가 쏜 하늘'이라고 부르길래 나도 같은 제목으로 붙여본다.
마지막 사진은 그냥 덤으로
 







원래 산위에 구름들이 몰려들어 또 다른 산을 이루는....  이 사진들 보다 훨씬 장관인 하늘풍경이 있었는데, 내 카메라가 늦었다. 
하늘은 내게 감동을 많이 준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겠지.
AND


봄비가 백곡을 윤택하게 한다는 곡우다. 변산 내려와서 처음으로 온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니까 변산 내려와서 처음으로 온종일 쉬고 있다. 사실 마냥 쉬려니까 마음이 썩 편한것만은 아닌데, 비 오는 날이라도 쉬자라는 기분으로 하루를 흘려보내고 있다.
내려온지 20일 조금 넘었는데, 아직 농한기고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되지 않아서 많이 바쁘지는 않다.(물론 일반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는 바쁘다의 차원에서 바쁘다는 말을 쓴 것은 아니다. ㅡ.ㅡ)

이곳 생활의 패턴은 아침 먹고 일하다가 참 먹고 일하고 점심먹고 일하다가 참 먹고 일하고 저녁을 먹으면 하루가 간다.

이곳은 먹을 거리가 좋고, 막걸리가 맛있고, 사람들(특히 아이들)이 좋다.

지후가 잠깐 다녀갔는데 정말 반가웠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을 대하는 서먹한 태도는 10년 전과 2년 전과 달라진게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마음은 많이 달랐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