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을 변산에 내려와서 읽게 되었다. 정말 훌륭한 분이시고 두고두고 읽고 싶은 훌륭한 책이다. 아주 인상적인 부분을 통으로 옮겨 본다. '영원히 부끄러울 전쟁' 이라는 산문의 일부분이다.

아무것도 감춰진 것이 없어 차라리 전쟁은 인간의 가장 정직한 행동을 그래도 보여주는 살아있는 연극일지 모른다.

전쟁만 없고 폭격만 없었다면

나는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신문 연재소설에서 시장 바닥에서 파는 삼류 대중 잡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고 있었다. 내 소년 시절은 눈과 귀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였다. 완전히 잡식동물이 되었던 것이다.

음식도 그렇다. 요즘도 누가 뭘 먹고 싶은 것이 없느냐고 물으면 언뜻 대답을 못한다. 음식에 대한 미각도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야 하는데 나는 병을 앓으면서도 절대 음식투정을 해보지 못했다. 무엇이나 그게 그런 맛으로 먹을 뿐이다. 입는 옷도 그렇고 잠자리도 아무데나 쭈그리고 누우면 잠이 든다.

<양철북>이란 영화의 주인공 소년 오스카는 성장을 거부하면서 어른들의 작태를 계속 주시하는데, 나는 일찍 체념한 탓인지 쓰레기장에서 그 쓰레기처럼 함께 묻혀 사는 쪽이 더 편했다. 오히려 깨끗한 것이 불편하고 싫다. 깨끗한 것이란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불신해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지난 날 어두웠던 그림들이 끝도 없이 스치고 간다. 일본 도쿄 시부야의 좁은 골목길에 모여 살던 사람들, 세상에 빈민이란 말만큼 성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하늘을 마음대로 쳐다본다.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빈민들이 살던 골목길엔 국경도 없고 인종 차별도 없다.

찐동야(광대)집 딸이었던 하나코 누나와 시장 모퉁이 삼류 영화관에 가는 즐거움, 빈터에서 어둡도록 숨바꼭질 하면서 놀던 애들, 오시카사마 신사에 축제가 있는 날은 야시장도 함께 열린다. 온 동네 애들이 몰려가서 공짜로 모든 것을 구경했다. 꽃밭처럼 환한 칸델라 불빛과 거기 펼쳐놓고 파는 물건들, 1전씩만 가지고 가면 대나무로 만든 딱총 하나씩은 살 수 있다. 누나들은 밤 12시가 넘도록 기다렸다가 군고구마를 떨이로 사온다.

전쟁만 없었고 폭격만 없었으면 가난한 그 동네에 평생을 살아도 좋았을 게다.

가끔은 나도 변산공동체에서 평생을 살아도 좋았을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이 대목이 가장 내 마음에 끌렸던 것은 단지 변산에 내려온 이후에 잘 씻지도 않고 살면서도 행복한 내 마음을 권 선생님의 마음과 비슷한 것으로 미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이됐든 간에 정말 좋은 책이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