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2~33

 그림속의 여인은 관객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욕망하는 남자를, 연인이라 생각하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 남자는 드로스트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드로스트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림 속 바로 그 여인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박물관에서는 보통 떠오르지 않는 생각이 떠올랐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 욕망이 또한 상호적이라면 - 그 대상이 되는 이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 아래층 전시실에 있는 그 어떤 갑옷을 입는다고 해도, 그 정도로 완벽하게 보호 받는 느낌은 가질 수 없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느낌 중 불멸의 느낌에 가장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p.70

 로잘리와 루카는 그가 출장을 다니며 발견한 몇몇 도시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고, 옛 친구들도 만나고, 자신이 구상했던 몇몇 발명품의 시제품을 한두 개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퇴 후 몇 년이 지나고, 로잘리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가끔 집을 나서서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따라 헤매다가,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했다. 결국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루카는 직접 아내를 보살폈지만, 로잘리는 서서히 기능들을 하나씩 잃어 갔고 마침내 병원에 입원했다. 루카는 매일 찾아가, 숟가락으로 저녁식사를 먹여 주었다. 가끔 아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그녀는 그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안 가면, 안 왔다는 건 알지 않을까요? 루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p.85

 깊이있는 정치적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글을 쓰는 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p. 109~

 할인 슈퍼마켓에 와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식품연쇄소매점의 지점이다. 지점 수가 팔천 개가 넘는다. 다른 슈퍼마켓의 절반 가격에 물건들-예를 들면 사과 주스 한 상자-을 살 수 있다. 슈퍼마켓은 도시 외곽 자동차 전용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다.

 슈퍼마켓 여기저기에 육십여 명 정도의 직원이 있고, 비슷한 숫자의 감시 카메라가 있다. 어떤 물건도 제대로 진열되어 있지 않다. 한쪽 면이 뜯어진 상자에 담겨 있다. 손님들 대부분은 정기적으로 찾는 사람들이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손님들 중에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는 가난한 노인들도 있고, 아이들이나, 파트너(파트너가 있는 경우), 본인 혹은 부양가족을 위해 물건을 사는 젊은 여자들이 많다. 모두들, 각자 형편에 맞춰 물건을 최대한 많이 사는데, 일 주일에 한 번-혹은 기껏해야 두번-이상 이곳에 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수레에는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고, 언제나 똑같은 음식들-예를들면, 마카로니, 멕시칸 토르티야, 소고기 아시 파르망티에 등-이 몇 개씩 들어 있다. 일부의 노인들만 현금으로 계산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신용카드를 사용한다. 월말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다들 신중하다.

 가끔씩, 따라온 아이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말이 없다. 우리 모두-손님과 직원들- 용의자이고, 우리의 움직임을 하나한나 관찰당한다. 모두 물건을 집어 들고, 수레를 밀고, 물건을 살피고, 코드를 입력하고, 조절하고, 야채 무게를 달고, 일정을 생각하고, 계산한다.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창고는, 절도(竊盜)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길거리 시장의 정반대다. 그곳에서 핵심은 흥정이다. 길거리 시장에서는, 모두가 최선의 거래를 하과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창고형 슈퍼마켓에서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도둑놈으로 여겨진다.

 자유공간은 거의 없고-물건 더미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계산대 앞에 늘어선 수레의 줄도 빽뺵하다. 내 앞에 수레를 쥐고 있는 사람은 임신부이다. 키가 크고 밝은 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폴란드 출신으로 보이고, 곧 태어날 배 속의 아이는 첫째가 아닐 것 같다. 수레에 담은 물건들을 계산대에 내려놓을 때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다.

 우리가 있는 이 창고형 할인 슈퍼마켓을 사로잡고 있는-다른 생각은 거의 모두 배제해 버리는-, 이 절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쇼핑하는 손님들의 도둑질. 종종 회사에서는 '수상한 손님'을 상점에 들여보낸다. 이들의 임무는 몇몇 물건을 몰래 가지고 나오는 일, 즉 계산원들이 얼마나 잘 감시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직원들의 도둑질. 직원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사야 할 때면 계산서에 관리자의 서명을 받아야 하고, 아무 때나 몸수색을 당할 수 있다. 회사에 의한 체계적인 도둑질은 직원들의 초과근무 시간에 대해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다. 계산원들은 적어도 일 주일에 두 시간 이상 임금을 받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 가끔 더 해야 할 때도 있다. 많은 직원들이-관리자급부터 그 아래로- 근무시간이 아닌 때도, 필요한 경우에는 밤낮으로 긴급 상황에 불려 나와야 한다. 병가는 허용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보장된 교대 시간 사이의 휴식도 없고, 역시 보장된 주중 휴무도 없다. 직원들의 권리에 대한 도둑질. 마지막으로 농산물 업계, 전 지구적인 식품 유통업계와 연결된 그 회사의 도둑질. 한때는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쥐고 있던 주도권,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변종과 종자, 비료, 기를 가축들 등에 대한 결정권을 뺏어 간 것. 한때 이런 것은 지역 내에서 현실에 맞춰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오늘날은 거대 기업이 생산자를 공급하고, 생산될 게 무엇인지 지시한다. 전 지구적인 농업이 미리 계획되고 있는데, 목적은 자연 전체를 상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폴란드 출신일 거라고 짐작한 임신부가 줄 맨 앞에 있다. 계산원들에게 주어진 분당 목표 계산량은 서른다섯 개다! 아무도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모두들 근무 평가에서 감점을 당한다. 계산할 준비를 마친 임신부가 신용카드를 긁는다.

 고개를 든 임신부가 내 뒤에 줄을 선 누군가를 알아본 모양이다. 어쩌면 둘이 같이 온 것일 수도 있고, 같은 시각에 이곳에서 장을 보기로 약속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상하게 조심스러워진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누군가를 확인하지 않는다. 짐작에 남자는 아닐 것 같다. 아마 여자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폴란드 여성이 고개를 들고 머리를 흔들며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여자는 계속 미소짓는다.

 그녀의 미소는 순수한 행복의 표현으로, 빛을 내면서 동시에 빨아들인다. 갑작스런 행복이 모두 그렇듯, 그 미소도 예측할 수 없다.

 그녀의 미소는, 한순간 다시 현실이 되어 버린, 잊어버린 약속들을 담고 있다.

 내가 그녀의 미소가 담고 있는 약속에 대해, 혹은 도둑질로 가득한 창고에 대해 과장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둘 다 존재한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존재하고 있다.

 

-> 와, 존 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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