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정양 | 2 ARTICLE FOUND

  1. 2009.06.02 백초즙 - 정양 2
  2. 2007.08.24 첫눈 - 정양

백초즙 - 정양

2009. 6. 2. 18:03
초여름 산길에서 풀 뜯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내 또래쯤 되는 것 같다
백초즙(百草汁)을 담그려고 풀을 뜯는다고 한다

콩알 백 개 헤아려 품에 넣고
풀 한 무더기 뜯을 때마다 쉼표처럼
콩알 하나씩 그 자리에 놓으면서
품안에 콩알 다 없어질 때까지
아무 풀이나 보이는 대로 뜯는다는데

풀 한 가지에 한 소쿠리식 백 소쿠리를
항아리에 삭혀 우려낸 그 백초즙이
묵은 해소도 가슴애피도 소갈증도
몰매 맞은 삭신도 다 풀려버리는
명약 중의 명약이라는데
이렇게 아무 풀이나 뜯다가
독초라도 섞이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못난 사람 못된 사람 다 소용 닿듯이
맛만 보아도 대번에 숨이 넘어가는
소문난 독초들이 섞여야 더 약이 된다며
나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할머니는
두어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다

못난 풀 못된 풀 모진 풀
짓밟아도 뜯어내도 다시 돋는
모질고 모진 꿈들아

할어미의 풀짐을 메고 화끈거리며
할머니의 굽은 등을 따라간다
못난 풀 못된 풀 다 소용에 닿는,
아무 풀이든 한 데 섞이어
명약이 되는 그 이치가 풀짐보다 더 무겁다


서울에 잠깐 올라와서 '변산에서' 태그를 쓰자니 좀 거시기하다.
정양 시인 고향이 김제여서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를 읽다보면 변산쪽이랑 왠지 통하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공동체에서는 희정이 형이 매일 4시 30분에 일어나서 특별한 일이 없는한 온종일 백초효소를 담그기 위해서 풀을 뜯는다.
오늘 엄마한테 잠깐 다녀왔는데, 피부가 좋아졌다고 했다. 나는 아마 먹는 것이 좋아서 그런것 같다고 했다.
백초즙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백초효소를 거의 매일 마셔서 그런것 같다.
시의 마지막 연은 크게 와 닿지는 않는데, 백초즙을 만드는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어서 시집을 변산에 두고 두고두고 읽고 있는 시 중에 한 편이다.  

포스팅을 하면서 다시 읽으니 못난 사람 못된 사람이 다 소용 닿는 곳이 내가 생각하는 마을 공동체의 모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못된 사람은 싫고 못난 사람으로 소용이 닿고 싶다. 일테면 경운기 운전도 서투르고 밭일도 남들보다 잘 못 하더라도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할 때나 단순히 힘쓰는 일이 있을 때, 내가 공동체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AND

첫눈 - 정양

2007. 8. 24. 21:57

한번 빚진 도깨비는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다고 한다
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했던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소용없는 사람아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버리는
저 첫눈 보아라
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
폭폭한 빚더미처럼
먼 산마루에만
희끗거리며 눈이 쌓인다






나는 허천난다는 말이 좋다. 외로울 때 쓰기 좋은 말이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