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에리히 프롬 | 1 ARTICLE FOUND

  1. 2009.08.16 20090816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했지만 일을 하게 됐다. 집안의 반응이 무척 좋다. 그렇지만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더군다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는 이런 대목을 읽었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비개성화된 평등이라는 이상을 설교 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중략.... 개인은 세, 네살 때 일치의 유형으로 유도되고 따라서 군중과의 접촉이 끊기지 않는다. 개인의 장례식 조차도 - 개인은 그의 마지막 사회적 대사건으로서 장례식을 기대하고 있다 - 이러한 유형과 엄밀하게 일치되어 있다.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의 일치와 함께 현대 생활의 다른 요인, 곧 일상적인 노동과 일상적인 오락의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평균화되고 노동력 또는 사무원이나 관리자의 관료적 힘의 일부가 된다. 그는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그가 하는 일은 이 일을 관리하는조직에 의해 지시된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들은 모두 조직의 전체적 구조에 의해 지시된 일을 지시된 속도로 지시된 방식에 따라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감정조차도 지시 받고 있다. 쾌활함, 믿음직함, 모든 사람들과 마찰 없이 지내는 능력까지도. 오락도 비록 격렬한 방법으로는 아니더라도 역시 상투적인 것으로 된다. 책은 독서 클럽에 의해 선택되고 영화는 필름이나 극장의 소유자에 의해 선택되고 광고의 스로우건도 그들로부터 지불을 받는다. 휴식 역시 일정하다. 곧 일요일의 드라이브, 텔레비젼의 연속물, 크다놀이, 사교파티 등이 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그는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고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내일부터 금요일이 마감인 문서작업을 정해진 방식으로 해야하고 중간중간 책도 읽고 영화도 한 편쯤 볼 수 있을 것이며, 퇴근후에는 거의 텔레비전을 보게 될 것이지만 희망, 정말, 슬픔,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을 갖고 살아야겠다.

예의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관료적 힘안에 일단은 들어가 보자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목을 읽고 뼛속까지 무언가를 느끼는 내가, 6월까지 농촌에서 지냈던 내가 청년인턴이 되어서 일을 한다니 많이 한심한 것도 사실이다. 

지후가 내 힘이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한 '내 힘' 때문에 지난주에 조금 괴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후가 내 힘이다.

에리히 프롬은 50년 전에 이런걸 썼다. 표준화된 인간들 중에서 특이한 개인이 되기 위해서 요즘 초식남이 유행인 것 같다. 프롬의 말에 의하면 초식남의 취미들도 일정하고 기성품화 되어 있는 상품속에 있다.

그냥 쭉쭉 건너 뛰면 결국 문제는 '매체'라는 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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