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김수영 | 3 ARTICLE FOUND

  1. 2011.11.27 눈 - 김수영
  2. 2011.04.16 강가에서 - 김수영
  3. 2007.08.24 시 두 편(둘 다 이글루스 정리하면서)

눈 - 김수영

2011. 11. 27. 20:16
 눈     - 김수영 -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AND

강가에서 - 김수영

2011. 4. 16. 00:52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
 속돼간다 속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년-

 
AND

관계 -김선우-

(고백할 게 있어 어떤 벌레에 관한 얘긴데 말야
달팽이 몸속에서 알을 까고 자라난대)
두려워하진 마 암세포처럼 무식하게
숙주를 절명시키진 않아 기어다니거나
교접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 없어 넌 열심히
먹이를 찾아다니고 나는 무럭무럭 커가는 거야
(놀랍지 않아? 몸속에 뭔가 기르고 있다는 거)
근데 말이지 난 이제 다 커버렸고
장년기를 보내기에 넌 너무 작고 초라해
좀더 쾌적한 새의 창자 안에서
말년을 보내는 게 내 운명이야
네 여린 눈자루로 침입해 들어갈 거야 고통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네 머리는 광채를 뿜어내겠지
넌 이제 한가롭게 마지막 산보를 즐기면 돼
멀리서 늠름한 새의 발톱이
빛나는 네 등짝을 찍으러 날아올 테니까
한평생 배밀이로 기어다니다
무덤도 없이 가랑잎 위에 뒹구는 걸 생각해봐
쓸쓸한 죽음은 질색이야 구름위를 날게 해줄게
따듯하게 버무려지는 네 육즙을 맛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을 들려주겠어
새로운 내 집이 맘에 들 거야 짓이겨지면서,
그때야 넌 모든 걸 깨달을지 모르지만
모든 끝장은 단호한 거야 난 네게 빚 없어
(놀랍지 않아? 날 키운 건 너야)


봄밤 - 김수영

고향 오라버니 같은 남자와 마주앉아 술을 마신다.
뚝배기 속에서 끓는 번데기.
다섯 잠을 자던 누에는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
다섯 겹 혹은 일곱 겹 주름을 뒤적이며
무심하게 안부를 묻는다.

이십대와 삼십대를 건너뛰는 동안
그리워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었던 것일까.
사각사각 푸른 뽕잎 위에 누워 낮잠을 잔 것처럼
눈이 부셔 흐린 안경을 잠깐 닦았던 것뿐인데....
우리는 그림자끼리 마주 앉아 있다.

그는 취하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나는 젖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돌아서 가는 등 뒤로 마른 산처럼 어깨가 솟아있다.
나보다 10년을 또 먼저 가는 사람.
하염없이 흔들흔들 산길을 걷고 싶은 밤,
살찐 봄바람만 낯익은 골목으로 불어온다.
날개는 다들 어디다 벗어두었을까.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