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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24 시 두 편(둘 다 이글루스 정리하면서)

관계 -김선우-

(고백할 게 있어 어떤 벌레에 관한 얘긴데 말야
달팽이 몸속에서 알을 까고 자라난대)
두려워하진 마 암세포처럼 무식하게
숙주를 절명시키진 않아 기어다니거나
교접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 없어 넌 열심히
먹이를 찾아다니고 나는 무럭무럭 커가는 거야
(놀랍지 않아? 몸속에 뭔가 기르고 있다는 거)
근데 말이지 난 이제 다 커버렸고
장년기를 보내기에 넌 너무 작고 초라해
좀더 쾌적한 새의 창자 안에서
말년을 보내는 게 내 운명이야
네 여린 눈자루로 침입해 들어갈 거야 고통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네 머리는 광채를 뿜어내겠지
넌 이제 한가롭게 마지막 산보를 즐기면 돼
멀리서 늠름한 새의 발톱이
빛나는 네 등짝을 찍으러 날아올 테니까
한평생 배밀이로 기어다니다
무덤도 없이 가랑잎 위에 뒹구는 걸 생각해봐
쓸쓸한 죽음은 질색이야 구름위를 날게 해줄게
따듯하게 버무려지는 네 육즙을 맛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을 들려주겠어
새로운 내 집이 맘에 들 거야 짓이겨지면서,
그때야 넌 모든 걸 깨달을지 모르지만
모든 끝장은 단호한 거야 난 네게 빚 없어
(놀랍지 않아? 날 키운 건 너야)


봄밤 - 김수영

고향 오라버니 같은 남자와 마주앉아 술을 마신다.
뚝배기 속에서 끓는 번데기.
다섯 잠을 자던 누에는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
다섯 겹 혹은 일곱 겹 주름을 뒤적이며
무심하게 안부를 묻는다.

이십대와 삼십대를 건너뛰는 동안
그리워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었던 것일까.
사각사각 푸른 뽕잎 위에 누워 낮잠을 잔 것처럼
눈이 부셔 흐린 안경을 잠깐 닦았던 것뿐인데....
우리는 그림자끼리 마주 앉아 있다.

그는 취하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나는 젖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돌아서 가는 등 뒤로 마른 산처럼 어깨가 솟아있다.
나보다 10년을 또 먼저 가는 사람.
하염없이 흔들흔들 산길을 걷고 싶은 밤,
살찐 봄바람만 낯익은 골목으로 불어온다.
날개는 다들 어디다 벗어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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