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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01 20090601 - 죽음에 대해서

가끔씩 오후에 배달되는 한겨레 신문을 저녁 작업회의가 끝나고 읽는다.
5월 초의 어느 토요일자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다.

 일전에 확인할 게 좀 있어서 나의 옛날 저서를 찾아내 편친 적이 있다. <민족을 읽는다>라는 작은 책이다. 그 책 마지막 장을 무심코 읽어가다가 다음과 같은 한 구절에 눈이 멈췄다. "나라는 인간이 올해 벌써 42살이 됐습니다....."
 나는 들었던 책을 내려놓고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58살이다. 말하자면 그 책은 쓴지 15~6년이나 된 책이었다. 새삼스럽게도, 마치 진귀한 발견이라도 한 양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떤 감회를 느끼게 될까?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야지"라거나 "여든살까지는 살아야지"하는 식으로 생각할까? 그렇다면 나는 보통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때 인생이 끝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것이 그때 내 마음을 채운 감회였다. 42살이었을 때가 행복의 절정기였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전혀 쓸모없었다는 얘기도 아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 거라면, 설사 그때 인생이 끝났다고 해도 그뿐,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죽는다'는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봄이 한창 무르익고 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서경식 선생의 아름다운 글이다. 원문은 여기로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3952.html

 내가 사랑하는 그르니에의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 그리고 우리는 그 술집의 종업원과 함꼐 최근의 항공기록에 대해서 잡담을 나눈다. 그 종업원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어느날이고 마땅히 죽으리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다.(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섬'의 <케르겔렌 군도> 중에서

 이 대목을 예전에 올린적 있는 '지중해의 영감'의 한 대목과 붙이면 이해가 간다.

 만일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그가 풍경보다 훨씬 더 멀리있는 죽음을 늘 자신의 배경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존재하는 자신의 최후에 대한 첨예한 직감만이 오로지 욕망에 한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오늘자 경향 신문에는 <다케시의 생각노트>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죽음에 대한 기타노타케시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생사 문제? 다케시의 유년과 청년기는 "죽는 것이 무서워 미칠 것 같던 시기"였다. 친구와 지인의 죽음이 천국도 지옥도 없이 그저 없어질 뿢이며 사람들 기억에서 너무나 간단히 지워지는 걸 보며 자신의 죽음도 두려워 한다. 이런 두려움은 인기 절정의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해소된다. "(사고를 겪고 나서) 운명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저 담담하게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얼마전에 노무현씨가 자살을 했다. 변산에서야 그냥 그런일이 있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모내기에 집중하면 될 일이지만 서울에서는 난리가 난 듯하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는 처지이지만 지후에게 들은바로는 유서에 "삶과 죽음이 하나의 조각과 같다"는 내용을 적었다고 한다.

 다 비슷한 맥락인 것도 같은데, 서경식 선생의 글에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선생의 책을 한 권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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