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그르니에 | 3 ARTICLE F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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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6.01 20090601 - 죽음에 대해서
  3. 2008.10.19 그르니에(Jean Grenier)

20110109 - 담배

그때그때 2011. 1. 9. 19:17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합정역에 갔다. 작년에 타워 크레인 사망 사고가 났던 합정역 자이 공사 현장을 지났다. 공사장 외벽에 '모두가 꿈꾸는 그 곳'이라고 써 놨다. 담배를 물고 현장앞을 지났다. 시간은 오후 1시였다. 공사장 안쪽에서 한 무리의 인부들이 오후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수런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공사장 입구에는 인부 한 명이 고개를 떨군채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불이 켜지지 않는다. 아저씨의 몸동작에서 고장난 라이터에 대한 원망과 체념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 아저씨 앞에 가서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내밀었다. 아저씨랑 내 눈이 삼 초 정도 마주쳤다. 아저씨는 얼른 불을 붙이고 나한테 라이터를 다시 건냈다. 아저씨는 담배를 피우며 모두가 꿈꾸는 그 곳에 사는 꿈을 꿀까? 그 아저씨랑 나 사이에서 한 마디 말도 없었던 10여 초 동안 흘렀던 공기의 흐름이 내 마음속에 지금도 남아있다.

 그르니에가 담배에 대해서 썼던 글에 보면 담배의 가장 훌륭한 효과가 어떤 특정한 순간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계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다음 대목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담배를 끊기 위해서는 담배 대신 다른 것으로 그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으면 된다고 했던 것 같다. 예를들어, 염주를 굴리는 것 - 바닷가에 가서 담배를 입에 무는 대신 염주를 굴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이 훌륭하게 담배를 대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담배를 끊고 싶지가 않다. 나한테 담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타인데, 기타는 일단 부피가 커서 항상 가지고 다니기는 어려운데다가 담배를 입에 물고 기타를 치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대신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보다는 훨씬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흡연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종국에 가서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아주 희소한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된다. 모두들 담배를 끊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대에 흡연이야 말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the last one이 될 가능성이 높은 분야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랑 정서적으로 너무도 다른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와 내가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빠서 담배를 끊어버리고 싶은 기분도 들었었는데, 낮아지는 흡연율은 그런 기분이 들 상황들을 줄여줄 것이 분명하다.

 담배 끊기 싫다는 얘기를 너무 길게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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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오후에 배달되는 한겨레 신문을 저녁 작업회의가 끝나고 읽는다.
5월 초의 어느 토요일자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다.

 일전에 확인할 게 좀 있어서 나의 옛날 저서를 찾아내 편친 적이 있다. <민족을 읽는다>라는 작은 책이다. 그 책 마지막 장을 무심코 읽어가다가 다음과 같은 한 구절에 눈이 멈췄다. "나라는 인간이 올해 벌써 42살이 됐습니다....."
 나는 들었던 책을 내려놓고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58살이다. 말하자면 그 책은 쓴지 15~6년이나 된 책이었다. 새삼스럽게도, 마치 진귀한 발견이라도 한 양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떤 감회를 느끼게 될까?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야지"라거나 "여든살까지는 살아야지"하는 식으로 생각할까? 그렇다면 나는 보통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때 인생이 끝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것이 그때 내 마음을 채운 감회였다. 42살이었을 때가 행복의 절정기였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전혀 쓸모없었다는 얘기도 아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 거라면, 설사 그때 인생이 끝났다고 해도 그뿐,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죽는다'는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봄이 한창 무르익고 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서경식 선생의 아름다운 글이다. 원문은 여기로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3952.html

 내가 사랑하는 그르니에의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 그리고 우리는 그 술집의 종업원과 함꼐 최근의 항공기록에 대해서 잡담을 나눈다. 그 종업원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어느날이고 마땅히 죽으리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다.(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섬'의 <케르겔렌 군도> 중에서

 이 대목을 예전에 올린적 있는 '지중해의 영감'의 한 대목과 붙이면 이해가 간다.

 만일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그가 풍경보다 훨씬 더 멀리있는 죽음을 늘 자신의 배경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존재하는 자신의 최후에 대한 첨예한 직감만이 오로지 욕망에 한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오늘자 경향 신문에는 <다케시의 생각노트>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죽음에 대한 기타노타케시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생사 문제? 다케시의 유년과 청년기는 "죽는 것이 무서워 미칠 것 같던 시기"였다. 친구와 지인의 죽음이 천국도 지옥도 없이 그저 없어질 뿢이며 사람들 기억에서 너무나 간단히 지워지는 걸 보며 자신의 죽음도 두려워 한다. 이런 두려움은 인기 절정의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해소된다. "(사고를 겪고 나서) 운명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저 담담하게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얼마전에 노무현씨가 자살을 했다. 변산에서야 그냥 그런일이 있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모내기에 집중하면 될 일이지만 서울에서는 난리가 난 듯하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는 처지이지만 지후에게 들은바로는 유서에 "삶과 죽음이 하나의 조각과 같다"는 내용을 적었다고 한다.

 다 비슷한 맥락인 것도 같은데, 서경식 선생의 글에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선생의 책을 한 권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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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Jean Grenier)

2008. 10. 19. 03:02

내 생에 단 두명의 작가가 있다면(조금 극단적이긴 한데...) 그르니에와 사라마구이고, 단 한명의 작가가 있다면 언제라도 자신있게 그르니에 라고 하겠다. 위대한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통찰을 읽을때, 나는 굉장한 희열을 느낀다. 아까 커피숍에서 한참 수다 떨다가 그르니에 얘기가 나온 김에 올려본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낯선 어느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몹시도 원했었다. 나는 겸허하게, 그리고 가난하게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섬'의 케르겔렌 군도 중에서

'섬'은 전체가 다 훌륭하지만 특별히 케르겔렌 군도 편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너무 좋아서 전체를 타이핑 한 적도 있었다. 내 불안의 터널에 출구를 어느정도 보여준 명문이다. 민음사 버전은 친구에게 준 관계로 청하 출판사 버전으로 올린다. 확실히 민음사 김화영선생의 번역이 좀 더 매끄럽지만 같은 맥락이다. '케르겔렌 군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에세이가 아닐까...

 아침이면 산 피에트로 성당에서 그레고리오 미사가 열리고, 저녁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온천장에서 음악회가 열린다. 하루 종일 대괴석들의 황홀한 흰빛을 볼 수 있고, 밤새도록 분수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들과 함께 있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외로움을 느낀다.

 '지중해의 영감' 이탈리아.... 에서 

 태양은 아프리카 산 위로 불쑥 솟아올라 사슴 빛깔로 물들이며 하루 종일 머물러 있다. 사람들은 바닷속에 다리가 잠길 정도록 길게 기지개를 켜는 이 짐승과도 같은 빛깔을 애무하고 싶어할 것이다.

 익명의 인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일, 나의 직업, 나의 가족,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곧 잊을 수 있을 것이며, 나를 잘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맡아야 할 역할도 없고, 더 이상 일부러 꾸며서 해야 할 어떤 태도도 이제는 없다.

 '지중해의 영감' 북아프리카....에서 

 만일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그가 풍경보다 훨씬 더 멀리있는 죽음을 늘 자신의 배경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존재하는 자신의 최후에 대한 첨예한 직감만이 오로지 욕망에 한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지중해의 영감' 에서

 지중해의 영감도 누군가에게 줘 버렸는데..기록해둔 노트를 오랜만에 꺼내보니 기록해 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 편에서 옮긴 부분이 아까 얘기하고 싶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났던 그 대목이다.

 예전에 신대성 군과 그르니에 얘기를 했었는데, 대성군은 그르니에가 제 1세계의 돈 걱정 없는 교수이기 때문에 아름답지만 태평해 보이고 마음속은 나약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다고 했었다. 나도 어느정도는 동의하지만 그르니에의 글의 훌륭함은 나쁘게 볼 수 있는 모든 방향을 다 취해보아도 바뀌지 않는 그런 차원의 것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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