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아버지 보러 다녀왔다.
 서울 가는 아내 강릉역에 내려주고 단골 커피집에서 모닝세트 먹으면서 요양원에 전화했다. '이따 두 시 쯤 갈게요.'
 집에 와서 멍하게 있다가 시간이 두 시 반이 된 걸 알았다. 이렇게 아버지를 잊게 되는구나 점점 불효자가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헐레벌떡 아버지한테 갔다. 아버지에게 가는데 장인어른한테 전화와서 요양원 도착할때까지 통화했다. 하나의 나 두 개의 아버지.
 아버지가 생활하는 4층에서 아버지 만난 게 두 번째다. 아버지 방에 가보니 아버지는 세상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작게 불러서 아버지를 깨웠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드리고 방 밖으로 나와서 방문 나오자마자 있는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횡설수설했고 나는 아버지를 마주보고 앉았다가 옆에 앉았다가 하면서 같이 셀카도 찍고 방금 찍은 사진도 같이 봤다. 아버지는 계속 횡설수설하고 나는 계속 아버지 잘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반복이었다. 그 반복이 지금 나와 아버지의 관계다.
 
  헤어질 시간을 귀신같이 아는 아버지가 이제 가라고 하길래 소파에 앉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안았다. 내가 '아이고 아버지' 하면서 아버지 등을 살짝 두드렸는데 아버지도 내 등을 두드리면서 '어, 어일우' 하고 그날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 내 이름 안 잊어버렸네' 했더니 아버지가 '너는 안 잊어버리지' 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깨웠을 때 '아이고, 네가 왔구나' 라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내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헤어질때는 덤덤했는데 집에 와서 치킨 시켜서 혼자 맥주 마시다가 많이 울었다.
 서울에서 아버지 만나고 헤어질 때 아버지가 나에게 '수고했다'단 말을 자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C8. 어제 이 생각을 하면서 또 울었다.
 아내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나랑 아내랑 같이 아버지 보러가면 아버지가 나만 알아보고 자기는 누군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가 내 이름은 잊어도 좋지만 내가 본인 아이란 걸 오랫동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버지, 돌아오는 일요일에 또 보러 갈게요. 제 이름 또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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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담배를 피우며

아는 형이 프랑스 담배를 줬다
경고 문고는 영언데 담배 이름은 불어다
어떤 언어로 적어도 담배는 독이다
김일성이 피웠다던 담배 던힐을 둔힐이라 불렀던 경상도 출신 친구랑은 30년 째 친하다
20년 전에 빠로스라는 멕시코 담배를 줬던 선배랑은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사이로 남았다
나도 그들도 여전히 담배를 피우니 연이 이어지는 일로 마음은 충분하다
찻집 입구 옆 탱자나무 가지 아래 벤치에
나에게 담배를 준 찻집 사장님과 나란히 앉아서
프랑스 담배를 피운다
탱자 잎은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누가 피워도 담배 연기는 평등한 흰색이다
사장님과 나는 둘 다 어깨가 아픈데 하나는 목디스크 하나는 오십견이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고 사장님은 찻집을 접으려고 한다
이렇게 평등한 세상이니
어려운 사람들 걱정하거나 떵떵거리는 놈들 부러워하는 일 없이
생에 더 바라는 것도 없으니
혁명처럼 프랑스 담배를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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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을 먹다

아내랑 삼겹살을 먹었지
동네 식당에서
둘이서 삼인분을 시켰지
밥 한 공기는 아내가
소주 한 병은 내가 먹었지
그러니 둘이서 오인분을 먹었지
고기 1인분의 기준에 밥과 술이 포함된다면
둘이서 이쩜오인분을 먹었지
그러니 결국은 둘이서 오인분을 먹었지
둘이서 두런두런 먹었지
배를 두드리며 이 골목 저 골목 두런두런 걸었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두런두런 나누면서
체육 공원 벤치에 앉아서 
여전히 배를 두드리며 공원에 나온 다른 삶들을 보았지
남들은 필생을 살고 우리는 허투루 사는 것 같았지
삼겹살에는 삶도 있고 살다도 있다는 허튼 생각을 했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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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집 앞 모과나무에 잎이 나지 않았다 꽃도 피지 않있다 올해는
그러니까 죽었다 모과나무는
비를 맞아도 살아나지 않는다 모과나무는
내 몸엔 잎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그렇지만 살았다 나는
비를 맞으면 춥다 나는
모과나무 앞에서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비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모과나무 잘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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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요양원에 간지 세 달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아버지 보러 갔다. 요양원은 1층에 사무실이 있고 3층, 4층을 생활관 및 프로그램실로 쓴다. 아버지는 4층에서 생활한다. 지난 일요일엔 1층에 있는 면회공간이 춥다고 4층에서 아버지 만나라길래 아버지의 공간에 처음 가봤다. 아버지가 위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라면서 좋아했다. 아버지는 본인 침대가 여기라며 방 들어가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4인 1실인 아버지 방 티비에는 ebs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학교 선배가 요양원 처음 차렸을 때 죽음을 너무 자주 접해서 스트레스가 많다고 했었는데, 아버지 있는 요양원도 40여명 어르신들 중에 우리 아버지처럼 몸을 잘 가누는 입소자는 거의 없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만날때마다 '이 양반 심심하구나' 생각이 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간 전체에 삶이 꺼져있는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 요양원에 입소해서 큰 스트레스는 덜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만나고 나면 늘 마음이 가라 앉는 이유가 이 죽음의 냄새에 있었나? 생각한다.

세계 인구는 폭증하고 있고 노인 인구도 폭증하고 있고 과인구는 지구에 해가 될 뿐이니 특정 조건에서 본인이 원하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세상이 올 수도 있겠구나 생각해본다. 아내가 가끔 어떻게 죽지?를 묻기에 이런 생각을 하나보다.

산림 기사 따려고 공부하고 있다. 2015년부터 산에서 일했고 16년에 산림청에 입사했다. 울적한 마음에 자격증 하나 갖고 싶어서 공부 시작했는데, 어렵다. 1차 cbt는 가볍게 붙었는데 2차 필답 준비가 어렵다. 마음가짐의 문제다. 내 삶에 산림기사가 절박하지 않기에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절박하게 외워지지 않는다. 한 번에 합격하고 싶고 산림기사를 따면 산림경영기술자 초급을 바로 받을 수 있으니까 그 마음으로 열심히는 한다. 27일 2차 필답 시험인데 조금 더 전력을 다해보려 한다.

아내랑은 잘 지낸다. 최근에 나랑 살아줘서 고맙단 생각을 많이하게 됐다. 나이 먹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 마음이 거짓은 아니다.

아는 선생님이 포남동에 7080라이브를 인수했다기에 갔었다. 사장님이 나를 반가워 해주셔서 기분 좋았다. 나중에 주문진에 사는 선장님 한 명이 손님으로 왔는데, 작년에 무슨 축제 노래자랑에서 1등 하셨던 분이라고 했다. 사장님이 나한테 노래 하라고 해서 한 곡 했더니 잘한다고 또 하라고 해서 다섯 곡을 연달아 불렀다. 이 선장님이 내 노래를 듣고 삘 받아서 노래 하시는 중에 가게를 나왔다. 7080 라이브에서 노래 배틀 할 뻔한 인생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조카들보러 구리에 한 번 다녀올까 싶다. 이런 생각 하는게 처음이고 최근이다. 나이 먹어서 그렇다. 동생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거 다 하게 해주는 나쁜 삼촌 노릇 좀 하고 싶다. 애들한테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전반적으로 울적하지만 그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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