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4가

가슴 속에 앙금이 쌓이듯
술이 내려오는 날이 있다
나는 끝없이 가라앉는 사람
사과는 땅에 떨어지고
풍선은 하늘로 오른다
큰사과는 제삿상에나 올려야지
풍선은 영어로 블룬 불른 불륜이지
사과는 썩고
풍선은 터진다
나는 썩어 터지는 사람
내 이름까지가 내 주소고
집이 있는데 갈 곳이 없다
나에게 자신이 없다
하여,
그저 을지로 4가에서 내리고 싶었다
1가도 2가도 3가도 아닌
5가도 8가도 아닌
특별한 일 없으면 특별할 일 없는
을지로 4가 한복판에
나무처럼 그냥 우두커니 서 있고 싶었다
지하철역 환승통로 에스칼레이터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사람들과
청계천 다리 위 인파 사이로
회색떼가 묻은 흰 비둘기의 치욕을 본다
오늘 날씨를 오늘 아침에 못 맞추는
일기예보 같은 삶이여
행운인지 불행인지
내게는 아직 가장 작은 액운도 닥치지 않았다
일기예보는 틀려야 맛이지
언젠가는 맞닥뜨릴 불행을 기다려야지
어느덧 술이 머리 끝에 차올랐다
자, 이제 집에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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