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번 국도 새벽 한 시

길을 건너다 죽은 죽은 고양이
길을 건너는 고양이
또 죽은 고양이
또 길을 건너는 고양이
눈치를 보다 길을 건너는 고양이
두리번 거리는 고라니
차에 치일 뻔한 고라니
또 두리번 거리는 고라니
길 옆으로 느리게 숨는 고라니
천지사방 고요속에 내 자동차와
자동차 전조등 빛과
고라니와 고양이
죽지 않았으면 살아있는
고양이와 고라니
AND

문제

​양파밭엔 양파가 문제
마늘밭엔 마늘이 문제​
​사과밭엔 사과가 문제
포도밭엔 포도가 문제
감자도 문제, 배추도 문제
비가와도 문제
가물어도 문제​
풍년이라 문제
흉년이라 문제
값이 없어 문제
못 팔아서 문제
사람도 없는데 인건비가 문제
비닐도 문젠데 비닐값도 문제
화학비료도 문젠데 비료값도 문제
기계가 있어도 기계값이 문제
해마다 늘어가는 빚도 문제
땅 주인이 문제
그놈이 가져가는 직불금도 문제
농사를 지어도 문제​
​농사을 안 지을수가 없으니 더 문제
AND

기름과 계란

차에 기름을 넣었다
가계부에 계란 5만원이라 적었다가​
아차, 하고 기름으로 바꿔 적었다
기름과 계란, 계란과 기름
계란후라이에 기름
후라이드 치킨에 기름
구리스가 없으면 삶이 빡빡하게 돌아가고
기름기 없는 삼시세끼를 상상하기 어렵다
계란 한 판 자동차에 넣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 할 수 있다면
계란 100개로 보일러가 겨울내내 돌아간다면
기름값 걱정 없는 행복한 세상이 올까
집집마다 애지중지 닭을 키우는 풍경이 흐를까​
지구가 닭의 행성이 되는 생각 아래로
기름을 먹은 자동차 바퀴가 구른다
AND

 우리집은 신발 벗고 들어오는 현관이 넓다. 네모난 현관자리가 네모난 마루의 한 가운데로 침입한 모양새다.

 마루에 누워 있으면 내 신발과 내 눈높이가 같은데, 나는 그 사실이 참 좋다. 누운 신발과 누운 나. 오즈의 다다미샷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나는 운동화 한 켤레만 신다가 떨어지거나 바닥에 구멍이 나서 비오는 날 못 신게 되면 새로 산다. 장례식장에서만 신는 오래된 구두는 자동차 트렁크 안에 들었고, 회사에서 신는 등산화는 회사 신발장에 있다. 아내도 물건 욕심이 적어서 신발 숫자가 적다.

 지난 주말에 넓은 현관에 달랑 네 켤레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사막 한 가운데 띄엄띄엄 나무가 서있는 느낌이랄까.

 신발은 신으면 닳는다. 안 신어도 닳는다. 신으면 더 빨리 닳는다. 시간의 이치다.

 지난해 겨울부터 신기 시작한 지금 운동화는 발뒤꿈치랑 닿는 안쪽이 좌우 모두 터졌다. 터진 것까지는 좋은데, 터진 자리에 뭔가 딱딱한게 튀어나와서 내 뒤꿈치를 자꾸 찌른다. 맨발로 신을 신고 걸으면 금방 상처가 생기는 지경이다. - 양말 신고 신으면 괜찮음. -

 지난 주말에 마루에 주저 앉아서 아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 운동화 사야돼, 란 말을 시작하는 바람에 아내가 내 운동화의 실체를 알아버렸다. 아내는 막 웃으면서 어떻게 그 자리가 터지냐, 왜 운동화에 딱딱한 게 들었냐, 는 말을 했다. 운동화 안쪽 바닥에 Reebok 글씨가 좌우 대칭으로 조금씩 흐릿해진 것을 - 왼발은 Ree자가 남고 오른발은 bok자만 남음 - 발견하고는 또 막 웃었다.

 아내가 웃으면 기분이 좋다. 그까짓 터진 운동화가 뭐 그렇게 즐겁게 웃을일인가.

 사랑이다.

 터진 운동화에 대해서 말하고, 그 신발을 보면서 웃고, 그 웃음에 마음이 무방비 상태로 해제되는일은,

 사랑이다.

AND

나무​

​오후 네 시
산에서 길을 잃었다
이대로는 죽는다는 생각에
몇 번을 넘어지며 산을 내려왔다
등산로 표지판을 발견하고 나서야
땀을 닦고 숨을 돌렸다
고개를 들자 나무가 있었다
내게 말을 거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나무
눈 코 잎도 없으면서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 나무
나무도 나도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나무를 안았다
그날의 냄새가 났고
그리운 이름이 떠올랐다
잘 있으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왔다
산에서 길을 잃은 날
입을 다물고 말을 거는 나무를 만났다
AND

적고 나서 씻을까 했다가 씻고 나서 적는다.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지난 목요일부터 안 좋던 몸 상태가 주말까지 이어졌다. 수요일에 비 맞으면서 일한 데다가 밤 기온에 아랑곳 않고 항시 문을 열어놓고 자기 때문이다. 

20대에 운동으로 만들어 둔 몸을 30대에 다 소진하고 40대에 와서는 전반적으로 힘이 딸리는 것을 느낀다. 내 몸상태는 대한민국 평균이라고 할 수 있는 흐름안에 있다. 평균이란 건 어떤 값들의 중간치이기 때문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보통으로 산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보통으로 사는 사람이 어디있나? 결혼 출산 대출 아파트 같은 큰 구찌안에 들어가는 삶, 혹은 필수라 부르는 일들이 보통인 걸까? 

주말 내내 밥 먹을 때 빼 놓고는 누워 있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방바닥에서 등을 떼기가 힘든 것이 아니다. 그저 무력한 상태로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K선배 꿈에 내가 나왔다고 해서 복권을 사지는 않고 번호만 맞춰봤다. 1등 번호에 내가 항시 사는 숫자가 세 개 포함되어 있었다. 5천원 짜리 꿈에 나왔다고 생각하니 웃겼다. 지난밤엔 열 시간을 넘게 잤는데, 꿈에서 우리 부부한테 사기 칠라는 놈들한테 잘 대처했다. 안심안심.

정선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내랑 몇 가지 얘기를 했다. 오늘 생긴 아내의 멍, 우리 회사 얘기, 사람들 얘기, 우리만 아는 발뒤꿈치 닿는 부분이 터진 내 운동화 얘기.... 그 10여 분이 허무하게 지나간 주말을 잊게 한다. 나도 하지 못하는 내 걱정을 해 주는 건 당신 뿐이다. 당신 팔에 생긴 멍을 걱정해 주는 것도 나 뿐이다. 걱정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 아니다. 걱정은 사랑의 몫이다.

정선 올라오는 차에서 넥스트의 <홈> 앨범을 들었다. 중고등학교 때 참 많이 들었던 앨범이다. '인형의 기사'는 노래방에서 누가 부르던 꼭 불렀었다. '아버지와 나 '에서 아버지와 함께 세월속으로 걸어간다는 신해철 목소리가 어리다. ' 턴 오프 더 티비'는 지금 들어도 참 좋다. 신해철은 이 다음 앨범과 그 다음 앨범에서 이전의 (작은)성공을 집대성한 곡들로 본인 음악의 정점을 찍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 없다. 

사람이란 게 게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니 내가 만든 노래는 다 비슷하고 내 일기도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고 언젠가 나도 세상에 없다. 

뭐랄까. 30대의 나는 20대의 나를 파 먹고 지금의 나는 그 전의 나를 파 먹고 산다. 그러니까 일정 나이 이후의 삶이란 건 자꾸 자기 자신을(과거를) 파 먹고 사는 느낌이랄까. 예전에 좋아했던 앨범을 듣는 일도 같은 맥락에 있는 것 같다.

갑자기 이상하게 흘렀는데, 사랑의 힘으로 이번주를 잘 지내보고 싶어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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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계탕을 먹다 2

복날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삼계탕을 먹는다
속이 채워진 닭으로 내 뱃속을 채운다
우리나라 인구 5000만명
하루 닭 소비량 200만 마리
닭 사육 두수 1억 7천만
1억 빚은 빚도 아닌 세상이니
한 마리 닭을 먹는 일도 무심하다
닭은 인간이 만든 사료를 먹고
사료를 만든 인간은 닭을 먹는다
돌려 막고 돌려 먹는
지극하고 지독한 순환이란 말
레일 위의 기차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있고
풍요의 꼭지점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알고도 모르는 척
세상에 섞여서
복날 삼계탕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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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을 살다

나는 참치회를 먹는다
참치는 고등어를 먹고
고등어는 새우를
새우는 플랑크톤을 먹는다
나는 고등어 회도 먹고
생새우도 튀긴새우도 먹는다
새우는 미세 플라스틱과 플랑크톤이 헷갈리고
고등어는 새우와 플라스틱 미끼를 헷갈리고
참치가 큰 입을 열면 헷갈릴 것도 없이
온갖 것들이 뱃속에 들어간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먹는다
할머니 생일을 축하하는 뷔페 식당의 모든 음식이
플라스틱의 사슬에 매여 있다
인간은 그렇게 플라스틱을 먹는다
모든 생명이 플라스틱을 산다
모두가 플라스틱의 은총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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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 일기

그때그때 2019. 7. 2. 17:25
  공무원 세계에는 해마다 두 번의 정기인사가 있다. 1월과 7월, 인사철이 되면 회사 안이 술렁거린다. 이번에 누가 어디로 간다는데 잘됐다. 누가 올건데, 어떤 사람이다. 나는 이번에 꼭 이곳을 떠날거다. 이런 얘기들이 최종 공문이 내려올 때까지 사무실 안팎을 떠돌아 다닌다.

  내가 죽지않고 살아서 계속 여기서 근무한다면 앞으로 약 40번 정도 이런 시기를 더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20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은 인사와 관련된 술렁이는 분위기에 익숙해서 누군가 오고 가는 일에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것 같다. 우리 회사에는 일 시작한지 3년도 안된 사람들이 많은데 - 나는 딱 3년 됨 - 이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 아직 익숙하지 않고 들떠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달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행정력 낭비다. 근데 어떤 사람이 한 곳에서만 계속 일하는 것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행정력 낭비다. 그러니까 정기인사라는 건 필요한 일이다.

​ 오늘 정기인사가 났다. 2016년에 입사한 6명 중에 나랑 옆 방에 한 친구만 남았다. 동료애가 있던 친구들은 그만두거나 먼저먼저 인사 때 다 떠났다. 그때마다 마음에 데미지를 받았더랬다. 이번에 작년 9월에 와서 나랑 술친구 해주던 20대 청년이 정선을 떠난다. 삼촌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인지 약간 섭섭하고 말았다. 요즘 팀장님하고 잘 지내는데 - 내 방에서 미션임파서블4 보면서 같이 술 먹다가 이명박이 박근혜보다 더 싫다고 하면 同鄕인데도 그러십니까? 라고 장난으로 물어보기도 함 - 이번 인사에 본인 희망지로 못가게 되서 나는 잘됐다. 팀장님 쏘리.

  회사 전통인지는 모르겠는데, 인사가 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회식, 팀별로 회식, 방별로 회식, 전체회식까지 회식이 많다.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숫자는 두 배로 늘어난다. 팀회식은 사람들이 다 그런가보다 하거나 흔쾌히 좋다고 하는데, 방별로 하는 회식과 전체회식은 많은 직원들이 부담스러워 한다. 억지로 술을 먹거나 더럽게 노는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 전체회식날 당직인 사람을 부러워하는 지경이다. 다른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회식이란 그런 것이겠지.

  다음번 인사때는 꼭 정선을 떠나고 싶어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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