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31 - 일기

그때그때 2019. 5. 31. 16:53

 아침 8시 반에 사무실에 앉아서 메모장에 우울이 막 뛰쳐나온다고 적었다.

 엊그제 회사 인사담당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떠나서 삼척에서 일 할 생각있냐고 해서 좋다고 했더니 고맙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두 시간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는데,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고맙다와 미안하다의 간극만큼 마음이 동요했다. 바닷가 가까운 삼척에 가면 매일 욕하면서 출근하는 정선의 높은 산도 안보는구나, 구불구불한 35번 국도와 42번 국도와 안녕하고 쭉 뻗은 7번 국도 타고 다니겠구나 기대했는데 미안하단 한 마디에 바로 무너져버렸다.

 나도 누군가에게 고맙다 했다가 바로 미안하다 한 일이 있을 것이다. - 떠오르는 사건은 없다. -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잘 아는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자주 그러면 안된다.

 '고인물'이란 표현이 있다. 익숙하고 오래됐고 잘 알고 잘 한다는 뜻이다. 회사에서 지금의 나는 '고인물' 단계를 지나서 '정선의 썪은물'이다. 더 익숙하고 더 잘 알고 더 잘 한다는게 안 좋은 건 아닌데 표현은 썪은 물이다. 그만큼 정선에서의 회사 생활에 물렸다. 정선 와서 3년만에 썪은물 신세가 됐다. 아무때고 우울이 막 뛰쳐나온다. 

 아내에게 괜찮다고 했더니, 자기한테 짜증이나 내지 말라고 했다. 알았다고 했으니 노력해야겠다. 회사 짜증이 주말에만 만나는 아내랑 아무 죄 없는 내 간으로 다 간다. 자주 못 만나서 그렇다는 변명을 할 수도 있지만 고맙다는 말도 없이 짜증내고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요일에 결혼식이 있어서 서울에 간다. 기타를 고치거나 새로 사야해서 토요일에 간다. 지난주에 영일군한테 얘기해뒀다. 잊었나 싶어서 아까 전화해서 토요일에 뭐 하냐고 했더니 아내에게 나 만난다고 말해뒀다고 한다. 다른 애들도 내가 오랜만에 서울 온다니까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 말 듣고 기분 좋아졌다. 그저 내 얼굴 보려고 나를 만나려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다음주에는 좀 쉬고 싶을 따름이다.

AND

퇴근길 - 정선에서 -

태양과 내가 가장 멀리 떨어진 계절
새끼들을 먹이느라 제비 부부가 부산하다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어린것들의 절실한 주둥이
읍내를 빠져나오는 다리 위
왜가리 한 마리가 강을 가로질러 눈부신 쪽으로 사라진다
사랑을 나누려던 참새 두 마리가 내 기척에 자리를 뜬다
공원 앞 은행나무 가지에도 참새가 한 마리 앉았다
내 마음 때문인지 그저 우연인지
오늘 본 참새들은 다 통통하다
건물 철거 공사장엔 멈춰선 포크레인 한대
너도 오늘 일을 마쳤구나
모퉁이를 돌면 내 작은 방
나를 기다리는 식은 밥
언젠가의 사랑처럼
식어버린 퇴근길
AND

늙은새

늙은새를 봤다
옥수수밭 옆 작은 숲속에서
내 낌새를 느끼고 푸드득 날았다
아주 잠깐,
그리고 불안한 착지
여전히 그 새가 늙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리다
가까이 다가가자
또 한 번 푸드득 날았다
먼저보다 더 잠깐
털빛이 세월에 삭았다
눈이 마주쳤다
피로로 가득한 늙은새의 눈
새도 내 피로를 읽었을까
먼저 고개를 돌려
내게서 먼 쪽으로 뒤뚱 걷는다
늙은새는 말이 없다
AND

또복이네 - 물회를 먹다 -

​속초 중앙시장
몇 번을 물어야 찾아갈 수 있는 골목에
지역 택시기사도 잘 모르는 작은 가게
50년 된 단골들은 다 죽어 없어졌다는 또복이네
언젠가부터 다리를 저는 김말복 할머니가
손님들 또 오라고 지은 이름 또복이네
한 축에 만원하던 오징어가 두 마리에 만원이 되가는 세월을 견딘 곳
막내 아들뻘인 나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장님 나이따라 물회가 점점 달달해지는 또복이네
물회를 먹다가 설탕을 덩어리 째 씹어도 또 가게 되는 곳


AND

고들빼기 사랑

​고들빼기
흔하게 있지만 ​
​꽃이 피어도 눈에는 잘 안 띄는 식물
사랑은 무엇과도 같을 수 있으니
씀바귀면 어떻고 엉겅퀴면 어떤가
꽃말은 순박함​
줄기가 잎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운다
스스로 상처 입히는 식물
사랑은 무엇도 될 수 있으니
고들빼기 같은 사랑은 순박한 고통
순박한 이들끼리
상처받고 상처받고
가슴이 뚫리는 고통 끝에 피어난 사랑
고들빼기 같은 사랑 

 

 

고들빼기  사랑(song ver)

씀바귀도 아니고 엉겅퀴도 아니네 고들빼기 1 5 6
흔하게 있지만 ​눈에는 안 보이는 고들빼기 1 5 6
​꽃이 피어도 눈에는 안 보이는 고들빼기 4 5 6
꽃말은 순박함​ 고들빼기 4 5 6

줄기가 잎을 뚫고 꽃을 피운다 3(7) 6
스스로 상처입히는 사랑 2 5 

사랑은 무엇도 될 수 있으니 4 5
씀바귀면 어떻고 엉겅퀴면 어떤가 6 3(7)

고들빼기 x4  6 5 2 5

나의 사랑은 순박한 고통 고들빼기
혼자서 상처주고 혼자서 상처받는 고들빼기
살을 뚫는 고통 끝에 피어난 고들빼기
씁쓸한 향이 나는 고들빼기

고들빼기 x4  6 5 2 5
고들빼기 x4  1 4 7b 1

 

AND

거미 죽다

거미 한 마리 죽었다
양칫물을 뱉다가 알았다
수챗구멍에 들어간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여덟 개 다리로도 올라오지 못하였다
출장으로 집을 비운 며칠간
겨우 하수구 거름망을 차지했다가
절망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아니, 거미는 절망을 모른다
둥글게 몸을 마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하고
배고픔에 죽었을 것이다
나는 죽은 거미를 그대로 두고
찬 방바닥에 눕는다
몸을 둥글게 말고,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발버둥은 치지 않는다
AND

지난 토요일이랑 일요일에 정선에 산불이 났다. 국유지 사유지 사이좋게 같은 동네에서 한 건씩 났다.

힘들다. 힘들어서 월요일 오후 조퇴를 썼다. 어디 드라이브라도 할까 싶다.

산불이 나서 힘든 게 아니다. 일이 힘든 게 아니다. 그냥 지금의 내 생활에 화가 나 있는 상태다. 나이 먹고 이런 권태기가 오니까 극복이 쉽지 않다. 일단 매일 아내 얼굴을 보면 나아질 것 같다. 그러지면 정선을 떠나야 한다. 정선이란 동네가 싫은 게 아닌데, 자꾸 동네 욕을 한다. 이거야 말로 좋지 않다.

일단 욕과 술을 줄이고 담배를 끊고 생활에 변화를 줘야겠다. 어떻게든 내가 극복하는 수 밖에 없다. 
AND

테트리스

​테트리스 꿈을 꾼다
길고 짧고 뭉툭하고 구부러진
블록으로 가득찬 세상
삶은 매일 다른 모양인 날들의 합
광대의 춤을 보고 악몽을 끝내려면
블록을 빈틈없이 채워 넣어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추락은 점점 빨라지는데
기다리는 블록은 내려오지 않고
바닥에 닿지 못하고 쌓이기만 하는 블록
게임오버 게임오버 게임오버
컨티뉴 코인이 없어도
삶은 계속된다
AND

4월, 발 아래

민들레꽃 피는 계절에
이름에 대해서 생각한다
발 아래 작은 것들을 보는 일이 좋있다
그것들의 모양과 색과 이름,
거짓없는 생을 보는 일이 좋았다
제비꽃 바람꽃 얼레지
몇 개의 이름을 아는 일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일로 어둡고 길었던 소년시절이 끝났다
당신에게 작은 것들의 이름을 알려 주는 일이 나의 사랑이었다
동풍이 부는 계절에 땅만 보고 걸으면서
당신 이름을 자꾸 부른다
이름이 실체가 되어 솟아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붙잡을 수 없는 이름을
거짓없이 지나간 이름을
이름을 모르는 봄꽃에게
영문도 모르는 봄꽃에게만
부르고 또 부른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