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30 - 일기

그때그때 2019. 4. 30. 00:00
정선 fatigue

​재미없다. 회사에 있는 하루하루가 재미없다. 순간순간 재미있을 때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냥 좀 물렸다. 기안문 쓰는 것도 이런저런 보고 해주는 것도 아저씨들 뒤치닥거리 하는 것도 질렸다.
물리고 질리고 재미없다. 출근길에 병풍같은 산을 보면 화가 치민다. 
이걸 통합해서 정선 fatigue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팀에 술자리 피하지 않는 사람들 성씨를 따서 염백유어 모임을 만들었다. 이런 사소한 것은 재미있다.
집에 잠깐 다녀오는 일로 환기가 되지만 잠깐 다녀오니 좋은 기분이 오래가지 않는다. 작년에는 아리아리시네마에서 영화를 봤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기타 연습도 강릉에 있을 때보다 적게 한다. 책도 많이 읽지만 읽을 때 뿐이다.
이걸 적고 있는 지금 비가 온다. 축축하겐지 칙칙하겐지.
나는 나 하는 일이 싫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다. 극복이 안된다. 다른 걸 해도 지금보다 낫다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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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길래
오랜만에 집에 다녀왔다.
아침 10시 안돼서 집에 도착했다.
아내랑 아내 회사까지 같이 걸었다.
봉봉 오픈 시간 전에 1등 손님으로 가서 커피를 두 잔 먹었다. 르완다도 맛있었지만 구지케차가 더 맛있었다. 봉봉은 기본으로 커피를 두 잔은 준다. 아 좋은 것. 동백씨 땡큐.
커피 먹고 집에 갔다가 아내 점심 시간에 맞춰서 다시 아내 회사에 갔다. 같이 밥을 먹고 집에 가서 한 숨 잤다.
오후 5시, 약간 피로했지만 다시 아내 회사로 갔다. 집을 나서자 마자 참새 한 마리가 입에 뭔가를 물고 나는 것을 봤다. 열 발자국을 채 못걸었는데, 멧새 한 마리가 입에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갔다.
흐린날 오후에 길쭉한 걸 물고 날아가는 새 두 마리를 본 것이 마음에 남았다.
따끈한 국밥 종류가 먹고 싶어서 저녁으로 설렁탕을 먹었다. 보통으로 두 개 먹을랬는데, 사장님이 특 하나 보통 하나요? 물었을 때 그냥 그렇다고 했다. 아내랑 같이 웃었다. 거절을 못하는 유형의 두 사람이 부부로 산다. 
저녁을 먹고는 아내랑 또 걸었다. 아내의 약속 장소까지 같이 갔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 너머 나눈 마지막 인사에서 사랑을 느끼고 정선으로 차를 달렸다. 잘 도착했다고 나눈 카톡 글에서 또 한 번 사랑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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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회를 먹다

강원도 정선까지 날 보러 온 친구와
정선까지 죽으러 온 우럭을 먹는다
간장에 와사비를 풀고
얼마전 태어난 둘째 아이 이름을 묻는다
술병이 자빠지기 시작하고
친구에게 아이 이름을 묻는다
매운탕 국물을 뜨다가
다시 한 번 아이 이름을 묻는다
횟집을 나와서 담배를 피우다가
아이 이름을 또 묻는다
둘 다 술과 담배가 가까운 곳으로만 가던 시절이 있었다
10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우럭회를 먹었던,
친구에게 아이 이름만 자꾸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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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 있는 사람이다. 짜증도 잘 내고 쉽게 토라지고 욕도 잘한다. 화가 난다는 건 좁게는 주변일이, 넓게는 세상일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 맘 같지 않은 걸 해결하려면 마음을 바꿔 먹으면 된다. 근데 마음이 마음대로 되면 마음이겠나. 마음을 바꾼다는 건 자존심도 상하고 세상에 지는 기분도 느끼게 한다.

아저씨 한 명한테 해고통지서를 보냈다. 산불 감시 근무를 서다가 초소 옆에 자작나무 물 빼먹는다고 구멍을 뚫었다. 경고장만 주고 해고는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윗선에서 해고를 원했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임산물 불법 채취로 사법처리 할 수 있다. 사법처리도 그렇고 과태료 딱지를 떼는 것도 과한 거 같다고 윗선을 설득해서 근무지이탈 및 쓰레기 투기로 단순 해고로 결제 받았다.

근데 어제 이 아저씨가 화가 나서 전화했다. 자기는 쓰레기 투기한 적도 근무지 아탈한 적도 없으니 곧이곧대로 하고 싶다는 것이다. 가만히 얘기 들어주다가 화가 나서 알았으니까 사법 조사 받을 준비하라고 했다. 나를 쉽게 생각하나, 생각하니 화가 났다.

오늘 생각하니 이 아저씨도 일이 자기 뜻대로 안됐다. 나무 구멍 뚫은 일을 들켰고 본인 생각엔 별거 아닌일로 해고 당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한테 화를 내고 못되게 굴면 안된다.

내 돈 떼어 먹은 먼저 집 주인 할머니도 그렇고 세상을 오래 산 사람들이 왜 그러나 싶다. 세상을 오래 살아서 그럴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생각만 하면서 화 적게 내고 살아야지.

월요일에 오래된 - 또는 오래전 - 친구를 만났다. 취해서 작은 아이 이름을 자꾸 물었다. 아침에 해장국 먹다가 작은 아이 이름을 한 번 더 물었더니 친구가 네 번째 묻는거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알려줬다. 정효. 그래서 그 이름을 잊지 않게 됐다.

오랜만에 강릉에 왔다. 봉봉에 오면 뭐라도 쓰고 싶다. 

씨팔, 그래 다 내 불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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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빨래를 널고 방을 닦는다
탈수가 끝난 오래된 빤스에 흰 먼지 묻는다
내 몸에는 소용없게 된 것으로
작은 방에 겹겹이 쌓인 흔적을 문댄다
찢어진 빤스는 쓰레기봉투에 던져 넣고
아무리 훔쳐도 지워지지 않는 생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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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오후 6시

​바람에 실려 오는 물큰한 공기
오늘은 종일 물냄새가 났다
제비는 낮게만 낮게만 난다
짝을 찾는 것이지 도망칠 곳을 찾는 곳은 아니다
낮과 밤의 경계에서 먼저 어두워진 하늘
곧 비가 오겠다
누군가의 부음을 들은 날
점점 짙어지는 퇴근길
다리 위의 사람들은 성급해 보인다
얼굴에 비 한 방울 떨어진다
나도 사람들도 도망칠 곳을 찾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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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기형도 시 전집이 나와서 오랜만에 기형도를 읽는다. 좋았던 것들은 그대로 좋고 새롭게 좋은 작품도 있다. '입 속의 검은 잎'의 시작 메모는 기억해 둬야 할 것 같아서 여기 남겨둔다.

 그리고 '가는 비 온다' 가 너무 좋다.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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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를 먹다

하루의 마지막 시간
셔터를 내리려는 분식집 앞에 멈췄다
순대 1인분 주세요
간 위 허파 염통 귀
간을 먹으면 눈이 좋아지고
염통을 먹으면 피가 맑아진다
먹으면 뭐든 좋아지는,
순대는 돼지가 주는 축복
마지막으로 둘이 먹었던 순대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이 태어난 날에 나 혼자 먹는 순대 1인분
순대는 둘이서 1인분을 먹으면 좋은 음식
​순대는 혼자서 1인분을 먹기엔 버거운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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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팀 회식을 했다. 비가 오면 산불 근무를 안 하니까 으레 회식을 한다. 어제도 많이 마시고 오늘도 꽤나 먹었다. 자기 자신이 자기 몸을 제일 잘 아는 법이니까 죽을만큼 먹지는 않는다. 올 1월 말에 팀장이 바뀌었다. 먼저 팀장만큼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대학생 때 돌도 좀 던져 본 형인 거 같다. - 모든 팀장이 나한테는 형이지만 이 형은 진짜 형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다. - 암튼 좋다. 지금 내 방에서 코를 골고 잔다. 인간은 인간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이불을 잘 깔아 줄랬는데 그럴 수 없는 지경이다. 그것도 좋다.

특수진화대 얘기 올리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연락을 받았다. 기자들의 집요함을 절감했다. 절실하니 집요하다. 나는 절실한 사람은 아닌데. 많은 매체에 특수진화대 얘기가 실렸다. 틀린 얘기도 있지만 일단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안프로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될대로 되라 잘못되면 투쟁한다.는 심보라 다행인 것이 있다. 동아일보 기자한테 연락 왔다며 걱정해 주는 전화를 받는 일이 좋았다. 인간은 인간인지라.....

회사에서 최근에 내 업무 파트를 둘이 하게 됐다. 작년에는 혼자했던 일인데. 둘이 하니까 좋다. 좋은 건 좋은데 어린 친구(28세)한테 내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너무 입히지 않나 싶어서 걱정 되기도 한다. 주말에 집에 못 가기는 둘이 같지만 나는 집에 가면 아내가 있는데. 그 친구는 애인이 없다.

지난 일요일에 집에 잠깐 갔다 왔는데, 낮잠을 잔 일이 너무 좋아서 뭘 적었다. 

술 먹고 짧은 일기를 적는 일도 좋고 지난 일요일에 잠이 깨서 적어 둔 것도 좋다. 씨팔 세상에 좋은 것 투성이네. 노래로 만들까 한다.


낮잠


낮잠을 길게 잤다
깨어보니 어둠
옆엔 당신
날 지켜주는 건 
나보다 키도 덩치도 작은 당신
나보다 마음이 넓은 당신

자는 당신을 지켜보다 잠들었다
깨어보니 어둠
날 들여다보고 있는 당신
날 지켜주는 건
내 작은 발을 사랑하는 당신
나보다 넓은 가슴을 가진 당신

AND

해바라기

화분에 물을 준다
아직 잎도 나오지 않은 어린 것
흙속에서 생각에 잠긴 해바라기 씨앗
간질간질한 껍질
축축해지는 머리 끝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
나는 어디가 아픈것도 아닌데
생기 없이 집안에 틀어박혀서
오직 생활만을 생각한다
나, 당신, 우리, 생활..... 무능
멍하니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베란다에 오후가 내려 앉았다
화분에 흙이 말랐다

AND

인연


당신이 말했다
네가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사람은 전생에 너를 죽인 사람이니 무조건 피해라
그 말을 남기고 이 생에 처음 만난 사람이 나를 떠났다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죽인 사람
나는 전생에 당신을 죽인 사람
우리는 죽어서야 이루어질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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