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를 보다

제비 한 마리가 난다
올해 첫 번째 제비를 본다
봄보다 먼저 찾아오는 제비는 없으니
이제 봄이려니 한다
기다렸던 것은 아니다
제비는 때를 알고
나는 제비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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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다녀왔다.
한 동네 살면서 12년간 같은 학교에 다닌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 결혼도 가장 빨리했고 아기도 가장 빨리 낳았고 아버지도 가장 빨리 돌아가셨다. 그 친구 포함해서 오늘 모인 다섯 명이 다 각자 집에서 큰 아이고 내 나이가 마흔 하나니 어찌 생각하면 이른 죽음이다.
상갓집에 가면 어디서 전해 듣기 전까지 죽음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에 잠겨있다가도 때가 되면 배가 고픈 것처럼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정선에서 진부역까지 차를 끌고가서 진부역에서 ktx를 탔다. 커다란 건물, 올림픽 마스코트, 아직 끝나지 않은 공사, 텅빈 버스 승강장,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 열차 도착 시간에 맞춰 도착한 택시 몇 대. 진부역은 과하다. 인간은 과하다. 욕심은 끝이 없다.
토지를 읽고 있다. 진부역을 보고 한 생각을 소설을 읽으면서도 한다. 전형적으로 느껴지는 수 많은 캐릭터의 향연, 인간의 끝 없는 욕망,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욕심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생긴다. 누군가 보기엔 나도 과한사람이다.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안식에 잠들지만 남은 사람은 한 동안 안도하지 못한다.
친구가 마음을 잘 추스렀으면 좋겠다.
AND

파문

퇴근길
다리 위에서
오리가 잠수한 자리를
그 파문을 바라보다가
먹이를 물고 솓아오른 오리가
해지는 쪽으로
멀리 한 점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삶이 파문인 것을 본다
AND

어느날의 일기

피곤한 저녁
라디오를 들으며 캔맥주랑 같이 뒹굴다가
갑자기 마음이 동해 물티슈로 방바닥을 닦았다
먼지가 묻어나온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세수를 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그대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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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봄​

땅을 보다가
꽃을 보고
나비를 보고
바람을 보고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초록을 보고
너를 보고
나를 본다
봄은 보는 것이라 봄이다
(너를 보고 내 그림자를 본다)
AND



술을 먹는다
삶은 생과 같은 말
생은 서럽고
사실 삶은 서럽다는 말보다 더 서러운 것
사랑까지 포함해서 시옷은 다 슬프고
슬프다는 말도 시옷으로 시작한다
술 넘어가듯 술술 풀리지 않는 하루하루
달콤한 사탕이 사탕발림이 되는 것이 인생
나의 속임수에 당신들은 울고 웃고
나 또한 당신들에게 그러하다
내 숨이 멈출 때 모든 거짓이 멈추니
삶은 슬프다 끝나는 것
술을 먹는다 차분히
눈 쌓이듯 슬금슬금 취한다
생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이냐
슬픔도 다 거짓이다
세월이란 말도 슬퍼진지 오래고
시옷은 다 슬픈데
정작 가장 슬픈 이별엔
시옷이 없다
AND

컵라면을 먹다 2

​컵라면을 먹는다
그리움에 생이 허하여 술을 마시고
마신 술에 속이 허하여 컵라면을 먹는다 
싸구려 용기에 새우가 그려진 컵라면을 먹는다
컵라면을 불려서 먹어야 해장이 된다던 엄마의 말
엄마는 자식들 건사한다고 허리가 휘도록 술을 마셨다
내가 술로 중년이 된 사이 술로 노파가 된 엄마
갈비뼈에 금이 가도록 술을 마신 엄마
언젠가의 엄마처럼 면발도 새우건더기도 나도 퉁퉁 부었다​
한 나라에 살아도 자주 보지 못하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전화도 못하고 불어터진 컵라면을 먹는다
AND

우는 것은

우는 것은 하늘입니까 바다입니까
3월에 눈 내리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우는 것은 하늘입니까 바다입니까
당장이라도 녹아 내릴 것같은 수평선은
분명 무엇인가는 울고 있는 까닭입니다
우는 것은 하늘입니까 바다입니까
아니면 잊지 못하는 나입니까
그저 그런 나입니까
AND

봄바다

걷고 또 걸어서 강 끝
육지와 육지를 잇는 마지막 다리
그 앞에 봄바다
봄은 봄 바다는 바다
그런데 봄바다
모든 강은 바다로 이어지고
너무 당연해서 기록조차 되지 않는 말들
끝은 시작
같은 자리에 다른 이름
시작과 끝이 뒤엉킨 어지러운 봄바다
봄은 봄 바다는 바다
나는 나
나는

AND

술 한 잔 먹었다.

오랜만에 생각한다
나는 꽤나 정치적이다.
사람들과 대체로 잘 지내고
그 사람들이 나의 어떤 지점을 인정해준다.
내가 그들에게 그러하듯이.
지난주부터 머릿속에 박혀 있는 생각은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다.
내가 누굴 이해하지?
나는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좋다.
내 아내가 너무 좋다.
세상에 너랑 나랑 둘 뿐이어도 좋다.
오늘도 많은 불찰속에 살았다.
그 생각 끝엔 항상 네가 있다.
AND

끼니를 거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끼니를 걸렀다
배고픔이 빈 속에 사그라드는 일이 오랜만이다
그간 참 규칙적으로 먹었구나
이유도 없이 밥을 거르는 호사를 누릴만큼
내 삶이 올바른 것 같지 않은데
꼬박꼬박 먹고 사는구나
배고픔을 잊고 사는구나
뭔가 잘못 된 건 아닐까
지금의 나를 버릴 자신이 있나
항상 끼니를 거르는 삶 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있나
꼴랑 한 번 거른 끼니에
나는 이 모든 생각들에 자신이 있나
특별한 이유도 없이 
끼니를 걸렀다
AND

컵라면을 먹다

​비 개인 아침 옥상
물 고인 바닥마다 파란 하늘이 있다
사발면이란 이름이 붙은 컵라면을 먹는다​
옥상은 기억의 장소
컵라면은 사색의 음식
뭘 먹든 떠오르는 당신 얘기를 
더는 적지 않으려 했지만
사발이란 이름만큼 예쁜 스티로폼 용기 안에
당신 얼굴이 라면 기름과 섞여있다
국물까지 싹 비우고나면
남는 것은 텅빔
텅빈 하늘을 밟고서 
컵라면을 먹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