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온갖 식물들이 씨앗을 떨구느라 난리다
겨울을 버텨도 모든 씨앗이 피어나지 못함을 알기에
가을은 슬픈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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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뭐라도 적어볼까
누웠다
누워서도 손이 움직이고 의식이라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작동한다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이건 새출발은 아니다
이미 출발했는데 또 출발한다는 건 서투른 위안이다
나는 바다 건너 나라의 대통령이 오늘 무슨말을 했는지 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세상의 모든 표면이 내 앞에 있다
이런 세상이라니
내 몸을 지탱할 밥을 먹으며 평생 가보지도 못할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안다
내 삶과 먼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들을 너무도 많이 안다
이런 세상이라니
뻔히 눈에 보이는 동시대를 침묵으로 일관할 수 있나
어설픈 마음 씀이 침묵보다 비겁하다
자려고 누웠다가
연필과 종이도 없이 엄지손가락 두 개만으로
이렇게 아무렇게나 휘갈겨쓰며 낮에 본 버섯을 떠올리는 세상이라니
그 버섯은 진짜였을까
전망이 없는 정상
실체가 없는 실재
실재가 없는 실제
밑이 없는 바닥에 혼자 누워서
반성이 없는 내일을 생각하는 밤
이 손가락질이 자정을 넘기지 말아야지
내일은 새출발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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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생일

날이밝기도 전에 눈을 뜨는 날이 많다
의자에 오래 앉아만 있어도 무릎이 시리다
등줄기에 땀이 흐를때까지 열탕에 몸을 담근다
해마다 사람이 태어나니 해마다 새 돈도 찍는데
반짝이는 총명함이 사라진 공터에 빈 기억만 나뒹군다

사랑을 장담하지만 그 사랑을 확신하진 못한다

이게 가장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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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내가 마셨는데 아내가 비틀거린다
아내의 걸음걸이를 따라 달도 비틀거리고
아내의 손을 잡은 내 마음도 비틀거린다
모두를 비웃고 싶은밤 비웃고만 싶은밤
달 그림자만 내 발걸음을 비웃는다
비틀비틀 당신은 어디로 가나
뒤틀린 나는 어디로 가나
두 손 꼭 잡은 우리는
어디로 가나
AND

산신제

시루떡 뒤쪽으로 바나나 한 송이
- 산신도 물 건너 것을 먹어봐야지

코피가 흐르는 돼지 머리 
- 돼지가 고뿔이 들었나

냉큼 절을 하고
오만원 짜리 지폐로 피를 막는다
- 아프지 않게 다치지 않게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니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절 한다
- 팔자가 참 좋으십니다

신이라면 신답게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예이 예이 예이

인간이 만든 신이라면 인간답게
나약하고 모자라게
- 유세차 유세차 유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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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해본다

볼음도에 다녀왔다. 출도 후 거의 삼 년 만이다. 자연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안심이 됐다. 갯벌도 논도 아직 그대로었다.

직장 동료 둘과 함께 다녀왔다. 나는 동네에 인사 드리러 간다는 생각이었는데 일행이 있다보니 내 멋대로 진행이 쉽지 않았다. 결국 방문 인사는 한 집도 못했고 잠시 섬 밖에 나가 계신 형들도 많았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을 봤고 짧은 인사가 내겐 힘이 됐다.

불행이면서 다행이도 동료 둘 다 조개 잡는 걸 좋아했다.  둘 중 한 명은 나랑은 같이 다니기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어째서 낯선 동네에서 무던하게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은근히 누군가 자기를 챙겨주기를 바라는가?

자본주의의 최대 폐해가 왜 내가 이만큼 돈을 들였는데 이것뿐이야,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마음이 정말 싫다. 차라리 돈을 물쓰듯 쓰던지. 가성비란 말만큼 웃기는 말도 없다.

나 왔다고 완이형이 많이 챙겨줬다. 긴 얘기 안하고 짧게 고맙다고 인사드렸다. 좀 더 자주 연락하겠다고 했다.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짧은 문장에 내 마음이 전해질까? 형, 정말 고마워요. 몸 아프지 말고 잘 계세요.

시(詩)는 여러 마음을 자연스럽게 짧은 문장 안에 구겨 넣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아무리를 백 번 반복해봐야
인간은 인간으로 점철된다.

그냥 고향섬이 너무 좋았고 밤에 잠깐 혼자 됐을 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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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

발전이 뭘까
사전에선 더 낫고 좋은 상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해
새거는 다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새 건물을 지으면 그걸 발전이라고 하나봐
먼저 있던 건물보다 높은 건물을 올리니까 발전이라고 하나봐
오피스텔 꼭대기 층에 사는 사람은 가장 발전한 사람이고 다세대 주택 반지하에 사는 사람은 발전이 없는 사람인거지
동네에 새 건물이 많으면 발전한 동네라고 해
공사현장이 많으면 발전하는 중이라고 해
발전하고 발전해서 하늘에 닿으려고 해
높아지는 건 나아지는 것
첨탑이나 굴뚝 지붕에 올라간 사람은 더 이상 발전하지 말라고 강제로 내려오게 하려고 해
발전도 마음대로 못하는 발전하는 세상
발전이란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이겠지
4평 반지하 방에서 이 글을 쓰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네
내 집은 열 평 전셋집이거든
그래도 내 주위에 발전하는 사람은 없지
이게 내 마지막 위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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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서

여러 색의 어둠이 바닥을 덮고 있다
기원을 알 수 없는 어둠 한 가운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는 내가 서 있다
어디선가 가는 빛이 스며 들어온다
어둠은 하나 둘 본래의 색을 드러낸다
가만히 나타난 내 그림자를 보고
내가 모르는 나도 나라는 걸 안다
외면하려는 나도 나라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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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창문을 열고 평균 시속 80 킬로미터로 정선에서 강릉으로 달렸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기도 하는 일이 자동차란 게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훨씬 넘어선 물건이라 그런 게 아닌가 생각했다.
자동차 뿐 아니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의 빠른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는 적응하며 산다. 산업혁명 정도를 기점으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조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속도를 생각하다가 색깔로 넘어갔다. 랩 가사 쓰듯 생각해보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은 다 본인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 그러니까 비슷한 속도의 사람에게 호감이 있지 않나? 극단적인 예문을 만들어 봤다. "저 친구랑 나는 술 마시는 속도(스타일, 주량)가 비슷해서 참 좋아." 물론 자기랑 비슷한 무엇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나는 대체적인 경향을 말하고 싶다.
속도는 색깔. 색깔은 스타일이다.
끼리끼리 노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남의 처지는 생각조차 않하는 일들이 많아 속상하다. 사드배치도 여중생 폭행 사건도 다 같은 맥락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나랑 스타일 비슷한 아내가 힘냈으면 좋겠다.
오늘은 금요일 밤이고 나는 술 마시는 스타일 비슷한 친구랑 술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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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년은 다리가 없다
소년은 날개가 있다
소년은 걷지 못한다
소년은 날지 못한다
한 번도 펼쳐 보지 못한 날개를 가슴속에 구겨 넣고
어떤 소년은 평생을 소년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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