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빙

인류보다 오래 살았다
지구 끝에서 떨어져 나왔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녹아 흘러간다
오래 살았어도 죽음은 늘 순간이다
아빠곰은 홀쭉해지고
엄마곰은 말라빠지고
아기곰은 아직은 귀엽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사라져간다
아빠곰 엄마곰은 배가 고파 죽고
아기곰은 아직 귀여운데
흐르는 것은 바다인가 유빙인가 눈물인가
눈물이 짠 이유를 알려주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희미해진다
바다가 된다
AND

오리

영하 십 도 추위에도 강물 위를 헤엄치다가 기다란 목을 물 속에 처박고 먹을 것을 찾는 삶
온 강이 다 얼고나면 쉴 곳도 없고 배가 고픈 삶
AND

돈가스를 먹다

해장으로 돈가스를 먹는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
이리 기름진 걸 먹어도 되나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온 소곱창에
이 나라 저 나라 술을 짬뽕했으니
국적은 문제가 아닐까
매일 매일 돈가스 해장으로
미끌미끌 미꾸라지가 되려나
기름기 뺀 얼굴아래 기름진 내장을 감추고
언제 어디서든 달아날 수 있게
마무리로 끈적한 데미그라스 소스를 핥는다
식당 사장님이 나를 보고 웃는다
해장 돈가스에 속만 느끼하다


AND

가루

몸을 긁는다
겨울은 건조하다
차가워서 습기가 얼어버리나
계속 몸을 긁는다
옆구리, 등짝, 허벅지, 종아리
손이 닿는 곳은 다 건드린다
살가루가 날린다
쌀가루처럼 뽀얗다
그래, 우주도 가루 한 점에서 시작됐지
가루로 끝나지 않는 것은 없지
몇해 전 겨울의 화장터와
가루가 된 내 아버지가 머릿속을 스치자
내 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가루가 되는 일로 대를 잇겠구나
삶이란 게 가렵고 우습다
자꾸 몸을 긁는다
밀가루 같이 허연 몸에서
살가루가 떨어진다
겨울이 지나간다
AND

이사에는 크게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자가이사, 용달아저씨 부르기, 이삿짐센터 일반 이사, 이삿짐센터 포장이사다.
내일이 이삿날이다. 우리는 자가와 용달이 섞인 형태의 이사 방식을 선택했다. 나는 포장이사를 하고 싶었지만 A형이 돈 아깝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원체 짐이 별로 없는데다 세탁기 , 장농을 두고 갈 거고 오늘 짐 싸면서 이것저것 버리고 나니 1톤 트럭 한 차면 짐 다 옮길 것 같다. 물론 내 자동차 안에도 약간의 짐을 실어뒀다. A도 트럭 갖고 와주기로 하고 크게 걱정이 없네.
이사할 집은 지금 집에서 차로 5분 거리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서도 자꾸 포장이사에 미련에 남는 건 냉장고 때문이다. 우리집에서 가장 덩치있는 짐, 결혼할 때 장모님이 사준 냉장고, 두 식구에겐 너무 큰 냉장고, 집을 나와 큰길로 나가는 쪽문과 새 집의 좁은 대문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은 냉장고, 이사 전문가들이 옮긴다면 깔끔하게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냉장고, 물건이 흔한 세상이라 어디 중고로 팔기도 어려울 것 같은 냉장고, 그러니 당분간은 나랑 같이 살아야할 냉장고.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에 안 좋아졌던 게 냉장고 운반 때문이라니. 주인아줌마가 돈 없어서 전세 보증금 바로 못 주는 거 보다 내일 깔끔하게 냉장고 옮길 일이 더 걱정이니 이런 내가 걱정이다.
AND

드립커피를 먹다

커피를 시킨다
- 늘 먹던대로 드릴까요
- 예
커피맛까지 세분화된 세상에
먼지처럼 살고 있다
카페 주인이 느리게 흐르는 물처럼
고요하고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린다
쿠키를 굽는 한쪽 구석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유조선이 바다에 흘린 것 마냥
커피 위에 기름이 둥둥 떠 있다
다 비운 커피잔에서 고등어 굽는 냄새가 난다
- 늘 먹던 맛이 아닌데요. 커피 한 잔 더 주세요
- 예
다음 커피를 기다리다가 트림을 한다
트림에선 순대 냄새가 난다
생의 언젠가 바닷가에서 순대를 먹은적 있다
새 커피에선 늘 마시던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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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술

술 못 마시는 사람도
예술을 할 수 있다
예술이 술 보다 쉽다
술도 마시고 예술이란 걸 해도
예술적으로 살긴 어렵다
예술이 삶보다 쉽다
AND

시간 흐르다

영하 십 도에서 영상 삼십 오도로
개미들의 공기와 우주의 진공 속에
청춘의 불안과 중년의 어깨위에
부자들의 뱃속과 가난뿐인 마음에
당신의 눈동자와 그 안에 비친 내 모습에
시간이 흐른다

표류하는 배 위에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에
누군가 머리를 볶거나
주사를 맞거나
아니면 TV 연속극을 보거나
또는 밀회를 즐길 때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세월이란 이름으로도
끝내 흐르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
AND

이사

이삿짐을 싼다
가지고 갈 물건과 버릴 물건을 나눈다
사는 동안은 떠돌이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언젠간 떠날 것을 알면서도
생활이란 핑계로
옷이며 그릇이며
살아온 만큼 모아두었다
책이며 이불이며
버리는 만큼의 죄를 쌓았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이사하면
부자가 된다는 거짓말에 웃는 당신
짜장면 먹어야 한다며 웃는 당신
그런 당신과 살아온 만큼 쌓인 사랑과
당신을 사랑한 만큼 쌓은 죄를
이 세속에선 어찌할 수가 없다
이 눈발 속에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AND

컨베이어 벨트

컨베이어 벨트 위에
핸드폰
운동화
햄버거


컨베이어 벨트 앞에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분노
사랑


어느새
컨베이어 벨트 위에
인간

 

song ver

컨베이어 벨트 위에
햄버거
도시락
삼각김밤
그걸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1 5 1 5 1 4 1 5 1)

컨베이어 벨트 위에
에어컨
핸드폰
자동차
월급모아 사야하는 사람들 (1 5 1 5 1 4 3b 5 1)

컨베이어 벨트 위에. (3b 7b. 6b 5)
물건들 물건들 물건들

컨베이어 벨트 앞에. (3b 7b. 6b 5)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컨베이어 벨트 위에
한숨
땀방울
처진 어깨
쉴틈없이 이어지는 우리네 삶

컨베이어 벨트 위에
분노
사랑
삶과 죽음
컨베이어 벨트 위에 인간

어느새 컨베이어 벨트 위에 인간
(3b 5 1) 

AND

동그라미

동그라미 안에 네가 있다
손을 뻗지도 않고
발길질도 하지 않고
동그마니 앉아만 있다
네 동그라미를 둘러싼 동그라미
그 안에 내가 있다
숨 막히는 공기속에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너에게 닿아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너처럼 동그마니 앉았다
동그라미 동그라미
그리고 동그리미
내 동그라미를 둘러싼 동그라미
그 안에 동그란 네가 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