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세상
가난은 허기로 허기를 채우고
주린 배를 움켜잡는 일
우린 가난한 건 아니라며
라면 먹자고 하니
아내가 웃는다
라면 물이 끓는데
부당한 일들로 가득한 세상 때문에
내 속이 끓는다
계란을 깨 넣는데
부정으로 가득한 내 마음에 금이 간다
세상이 하라는대로
순응하고 살았는데도
저녁을 먹었는데도
한 개로는 부족해서
세 개를 끓인다
세계의 우울이 국물 속에 잠긴다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만화 같은 인생
만화 같은 사랑
설거지는 내일로 미루고
세상 근심 다 잊고
오늘은 널 사랑해야지
새로 태어날 각오로
깊은 잠을 자야지
AND

낮술

뒤틀린 입으로 썩은 말을 내밷듯
뒤틀린 손가락으로 오타에 썩은 글을 써내려한다
취했다
보잘것 없는 세상이 힘에 겨웠다기엔
결국은 취할 내가 가당치도 않아서
그냥 취했다
마지막엔 잔까지 마실 지경이니
첫 잔은 반 만 마시고도 이렇게 대취하였다
모처럼 만나서
맹물 먹고 얘기하긴 부끄러워서
해 넘어가기도 전에
태양 앞에 부끄러운 민낯을 보이는 중이다
죽지 못해 산다면서 죽도록 술을 마셨다
오후 한 시에 새벽 한 시만큼 취했다
적막이 흐르는 아구탕 집에서
당신과 단 둘이 소주를 마셨다
갈 곳은 한 곳 밖에 없는 것을
알고도 취해버렸다
이토록 사랑하는 당신과 술을 마셔도
취하여 오늘이 사라지고 나면
평소엔 잊었던 원망만 떠오른다
당신에 대한
아내에 대한
세상에 대한,
당신을 닮은 달의 그림자여
어서 모습을 보여
나를 너의 길로 이끌어다오
무엇이라도 탐하고 싶지만
부끄러워 탐할 수 없는
이 환한 오후를 지워다오
마침 나보다 더 오래 살았을 전봇대가 보인다
피곤의 냄새가 나는 오줌을 누고
전봇대에게, 나를 기다린 너에게
나는 미안해졌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도 삶은 앞으로만 나아가고
세상이 끝나도 우리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겨울을 못 버티는 어린 싸리나무
죽기 전에 너를 안고 싶다
탐욕스럽게 적어댔지만
별 내용도 의미도 없는 것들 뿐이다
획실한 한 가지는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외롭다는 것
그래서 더욱
죽기 전에 너를 안고 싶다
너는 이 세상에서 나를 찾아온 유일한 사람
그러니 더욱
죽기 전에 너를 안고 싶다
이 모든 것은 소득 없는 각성
그러니 더더욱
술이 깨기 전에
밤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너를 안고 싶다
이 모든 사탕발림이
대낮에 대취한 까닭이다
그래도 너를
안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AND

위축

멈추지 않고 딸꾹질 천 번 하면 죽는다는데
언제 시작했는진 몰라도 900번을 넘겼다
언제 시작했는진 몰라도 이유는 확실하다
100 딸꾹, 99 딸꾹
98, 97, 96, 95.......
딸꾹 딸꾹 딸꾹 딸꾹
너 떠나며 수축된 횡경막이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나는 당신 앞에서 위축되는 사람
이별통보에 벙어리가 되어서
이유도 묻지 못하고
이렇게 죽어 간다
죽는다면 육교 위에서라고 생각했다
육교 한 가운데 올라섰는데
오후와 하늘 사이의 거리가 멀다
하늘길을 건너기까지 열 번 남았다
백초라면 인생을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10 딸꾹
9 딸꾹
8, 7, 6, 5........2
딸꾹 딸꾹 딸꾹 딸꾹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 극적 반전도 없는
위축되는 축생이여
이번이 마지막이다
딸꾹
딸꾹질 1000번에도 죽지 않는
건강한 몸이 반전아닌 반전이구나
위축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집에 가서 냉수 한 잔 먹고
육교로 돌아와서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겠다
AND

대설주의보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첫눈에 대설주의보 내렸다
사흘째 눈이 내리고
나는 다시 눈을 치운다
쌓이는 속도가
치우는 속도보다 빠르다
소용없는 일에
하염없이 매달려 있다
눈삽 가득 눈을 모아
집 앞 개울에 밀어 넣는다
풍덩,
아뿔사,
물이 검다
그 검은 물에 흰 눈이 녹아 내린다
검게 녹아 사라지는 눈덩어리여
내 죄를 알려주는가
이번 생은 가망이 없다고 하는가
눈은 계속 내리고
나도 계속 검은 발자국을 놀린다
AND

방황


터미널에 내려 비를 맞는다
무거운 짐가방이여
이 비는 나를 환영하는가 만류하는가
낯선 도시의 백화점 화장실에서
속을 비우고 몸이 가볍다
이 똥은 새로운 시작의 신호인가 끊지 못한 미련의 덩어리인가
구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아 언덕에 오른다
가파른 내리막만이 나를 기다린다
몇 번이고 너에게 전화를 하지만
없는 번호라는 응답만 들려온다
온전치 않은 욕망으로 술을 마시고
국밥으로 해장을 한다
흘린 밥알을 주워담듯
깨진 욕망들을 서둘러 주워 담는다
밤에 떠올랐다 아침이면 사라질 생각처럼
몰려드는 욕망이 사그라지길 기다릴 때다

지금은


AND

아파트


새들이 사는 높이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잔다
날갯짓은 하지 않는다

새들이 사는 높이에서
사람들이 추락한다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날갯짓은 하지 않는다

새는 날개를 사람은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

(나는 땅에 닿기 전에 날개를 펼치리라
그 날개가 깃털이 달리지 않은 날개더라도)
AND

첫눈

눈은
네 마음처럼
내 마음처럼
환하고 어두운 날 내린다
첫매에 불알 터진다고 첫눈을 조심하랬는데
너랑 헤어진 마당에 조심할 것도 없다
매일 다니던 길에 눈이 쌓였다
풍경이 바뀌었는데도
너를 향한 내 마음은 그대로 그대로
내 마음같이
어쩌면 네 마음같이
오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눈이 내린다
사박사박 소복소복
보고픈 사람
그리운 이름
가만히 밤이 내리고
그 위에 내 마음같이
첫눈 내린다
AND

월요일 점심의 불륜


(나는 삿된 생각이나 해쌌는 평범한 중생
엄청 삿된 생각을 하는 엄청난 중생
엄청난 중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엄청 삿된 중생)

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삶
멍하니 죽고 싶다

산을 넘는 태양과
몰아치는 파도는
아무런 구실이 없다
허나 사랑은 인간이 하는 것
이별은 모든 인간을 망치는 법

인간은 구실이 있어야 뭐든 잘한다
눈물 한 방울 떨굴래도 공짜는 없다
너는 내가 살아가는 구실
월요일 점심에 너와 마주 앉아
여러 감정이 뒤엉킨 회덮밥을 먹으며
너에게 잘 하고 싶다

내가 너에게 전력을 다하고
너도 뭔가를 구실로 나에게 잘하면
그때는 사랑이며 이별이며
인간이니 구실이니 하는 것들 다 잊고
멍하니 죽고 싶다
AND

 달 식민지의 자유민들이 지구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낸다.는 간략한 스토리다. 작품 내내 재기발랄한 위트가 넘치고 마지막에는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브라이언 싱어가 영화로 만든다는 소문이 있다.

 달 세계의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구절이 있어서 옮긴다. 국운이 기울어진 - 인류의 운명도 - 이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Distrust the obvious, suspect the traditional."

 

p. 458 

 "의원 동지 여러분, 정부란 불과 핵융합처럼 위험한 하인이며 두려운 상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여러분은 다른 어떤 폭군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손에 의해서 더 빨리 이 자유를 상실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좀더 천천히, 더 신중하게 모든 어구가 의미하는 결과를 해석해야 합니다. 저는 이 헌법 제정 위원회가 그러한 연구에 10년 동안 매달린다고 해도 별로 유감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1년도 안 돼서 보고서를 내놓는다면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불신하고 전통적인 것을 의심하십시오........ 과거 인류는 스스로 정부라는 안장을 얹었을 때 별로 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초안 보고서 한 장에서 달 세계를 선거구별로 분할하고 주기적으로 인구에 따라 의원 수를 다시 배분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제안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의심을 받아야 하며, 무죄가 증명될 때까지는 유죄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내가 다른 방법을 제시해 볼까요? 인간이 사는 장소가 그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덜 중요한 요소임을 틀림없습니다. 선거구는 직업에 따라 유권자를 분할함으로써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연령별로.... 심지어 알파벳 순서로도 가능합니다. 또는 유권자를 나누지 말고 모든 의원을 전국구로 선출할 수도 있습니다. 달 세계 전역에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면 당선 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달 세계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심지어 여러분은 가장 적은 표를 얻은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까지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기가 없는 사람은 새로운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터무니없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 제안을 거부하지는 마십시오. 무엇이든 천천히 생각해 본 후에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선출된 정부가 다른 정부보다 더 나았던 것도 아니며 때로는 명백한 압제자들보다 훨씬 나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의 정치 체제가 여러분의 최종적인 결론이 된다 해도 여전히 선거구를 지역으로 나누는 것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이것을 성취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여러분 각자는 1만 명가량의 주민을 대표합니다. 약 7000명의 유권자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일부는 소수 거주 구역에서 선출되었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선거 대신에 4000명의 시민이 서명한 청원서로 공직에 나갈 자격을 부여받는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4000명의 사람은 확고하게 대표하지만, 반대로 불평하는 소수파는 전혀 대표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지역구 내에서 소수파인 사람들도 다른 청원서를 받거나 다른 청원서에 서명하는 것은 자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그들이 선택한 사람을 대표로 세우게 됩니다. 어쩌면 8000명의 지지자를 가진 사람은 이 기구 안에서 두 개의 투표권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해결해야 할 난점, 반발,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럿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의 정치 시스템의 만성적인 병폐를 피하고, 공민권을 박탈당했다고 느끼는(사실 옳은 느낌이지요!) 불만 있는 소수파들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과거에 구속받지는 마십시외!

 저는 의회를 양원제로 하자는 제안을 보았습니다. 훌륭합니다. 입법에는 장애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전통을 다르는 대신에, 저는 입법가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관과, 오로지 법률을 폐지하는 것만을 임무로 삼는 또 하나의 기관으로 나눌 것을 제안합니다. 입법 기관은 정족수의 3분의 2의 찬성으로 법안을 통과하게 하고.... 폐지 기관은 3분의 1만 찬성해도 어떤 법이든 폐지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터무니없다고요?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법안이 여러분 가운데 3분의 2의 찬성을 얻을 수 없을 정도라면 쓸모없는 법률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법률이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면 그런 법률은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헌법을 작성하는 데 '부정'이라는 훌륭한 미덕에 관해 깊이 생각하길 바랍니다! 부정을 강조합니다! 정부가 영원히 해서는 안 된다고 금지하는 숨낳은 일들로 여러분의 문서를 가득 채우십시오. 병역 징집 없음..... 출판, 언론, 여행, 집회, 종교, 교육, 통신, 직업의 자유에 아무런 사소한 간섭도 없음...... 납세자가 동의하지 않는 어떠한 세금도 없음..... 동지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5년 동안 역사 연구를 하고 여러분의 정부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할 사항들을 여러 가지 생각한 후에 여러분의 헌법을 그렇게 부정으로 가득한 문서로 만든다면 저는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가장 두려원하는 것은 실행이 요구될 듯한 무언가를 '하도록' 정부에 권력을 부여하는, 성실하고 선량한 의도를 지닌 사람들의 확신에 찬 행동입니다. 지구의 달 세계 총독부가 대중의 인기를 얻어 선출된 성실하고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대단히 고귀한 목적을 위해 만들었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마십시오. 이제 어의 이러한 생각을 말씀드리고 여러분에게 어려운 산고를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AND

일요일 아침

뱃속에 밥을 좀 집어 넣으니
커피가 땡긴다
커피 향기를 맡으니
담배를 피우고 싶다
이어서 양치를 한다
무료한 시간이 오자
잠든 너를 깨우고 싶다
비 내리는 일요일 아침
세상에서 나와 교감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러나 새벽에 잠든 너를
차마 깨우지 못하고
바라만 본다
너는 깨지기 쉬운 사람
너를 바라보기만 하는 일도 조심스럽다
내가 세상을 욕하면 그 욕을 다 들어야 하는 사람
내가 방귀를 뀌면 그 냄새를 맡아야 하는 사람
나랑 같은 냄새가 나는 똥을 싸는 사람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널 보는 것 말고는 웃을 일이 없다
나는 너로 귀결된다

AND

귀머거리 공주

폭정을 일삼던 왕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단두대에 올려졌고
본인처럼 되지 말란 유언을 공주에게 남겼습니다
왕은 딸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백성들은 아비를 잃은 공주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여왕 자리에 앉혔습니다
백성들도 여왕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도 공주를 더 가엾게만 여겼을 거에요
공주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아버지를 죽이는데 가담한 사람들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습니다
공포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처음엔 신하들이 만류했지만
여왕이 귀머거리인 것을 알고나자
신하들은 여왕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어요
귀머거리 여왕은 말도 잘 못했지요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은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생각했지만
누구도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귀머거리니까요
자신들이 그녀를 여왕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아주 우연히 여왕은 자신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왕궁 안의 산책길에서 어떤 새도 울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거에요.
여왕은 외로워졌습니다
홀로 거리로 뛰쳐나간 여왕은 사람들 앞에서
외롭다고 소리질렀습니다
누구와도 얘기해 본 적 없는 여왕의 말은
죽여줘로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여왕이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왕에게 돌을 던졌고
어떤 신하도 그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귀머거리 여왕은 자신이 귀머거리란 걸 알자마자
그렇게 돌에 맞아 죽었어요
그래도 세상은 평화롭지 않았답니다
또 다른 귀머거리가 왕이 됐거든요
AND

성수(Aqua Benedicta)


원 없이 죽을 수 있게
생명보험을 들었다
집에 불을 지르고 죽으려고
화재보험도 들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조금은 덜 슬프게 나를 기억하겠지
조금은 더 오래 기억하겠지
돈은 세상에서 가장 독한 독이지만
평생 물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남은 식구들이 한 번도 행복한 순간 없이
살다가게 하고 싶지 않다
죽기 전에 꽃집에 전화해서
'축사망'이 적힌 화환을 주문했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눈물이 마를 무렵
아내가 뒤에서 나를 안는다
살자고
같이 살자고 운다
내 뒷목에 떨어진 눈물로
축복받은 나는
깨끗해진 나는
살아야겠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너랑 살아야겠다

AND

나는 약해빠졌다.

어제 비를 맞고 일했다. 피곤해서 오늘 쉬었다. 지금 하는 일은 아니, 지금 내 상황은 피곤하다고 쉴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무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런 여유가 미안하다. 나보다도 처지가 안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렇다. 나의 뮤즈 jk도 일 하기 싫었겠지만 툴툴거리면서 출근했을 것이고 몸이 약한 s형도 주중에 빠지면 월차(월차란 건 없어졌다는데, 왜 우리에겐 있는걸까?)가 없어지니까 출근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동료들에게 미안할 일은 없는데,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오늘 쉰 게 미안하다. 그래도 무리하고 싶지 않다.

쉬는 김에 우체국에 가서 신춘문예 응모작들을 10곳에 보냈다. 되면 좋겠지만 안되도 그만이다. 가끔 어째서 내가 쓰고 있나,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미안함 보다는 풀지 못한 내 욕구를 쏟아내는 쪽에 가깝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글을 좋아하면 좋겠다. 헌데 세상에 대해서 쓰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당분간은 계속 쓰겠지.

내 마음은 건조하다.

야구에서 일본을 이겼다. 극적인 게임이었지만 그렇게 뭉클하지 않다. 아내가 여러 동물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넌 뭐가 신기해?' 라고 묻는다.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그다지 신기한 게 없다. 어지간한 일에는 감정이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낮에 메모 정리하다 보니 볼음도에서 이런 걸 적었더랬다. '엊그제 우리 쌀로 밥을 해 먹었다. 맛있었다. 내가 농사 지은 쌀을 먹는 기쁨은 없고 그냥 맛있다는 생각만 했다. 건조한 계절을 따라 나도 건조해져 간다. 올해로 서른일곱이 되었다. 나이 먹는 일에 아무런 느낌도 없다. 그저 그뿐이다.' 요즘 이때보다 더 메마른 것 같다.

방금 전에 탕파에 물을 채우면서 아내가 웃었다. 그걸 보니까 마음이 풀려서 나도 활짝 웃었다. 아내도 내가 웃는 걸 봤겠지. 네 웃음 때문에 내 하루가 있다. 가까운데서부터 먼데까지 세상 여기저기에 미안하지만 네 웃음이 다 잊게한다. 보통 여섯시에 일어난다. 내가 가장 총명한 새벽 시간에 가장 깊은 잠에 빠진 세상을 잊고 잠든 너를 보면서 아무도 못 보게 혼자만 활짝 웃는 게 내 기쁨이다. 너랑 나는 다른 시간을 살더라도 너는 내가 살아가는 구실이다. 너를 구실로 내일 또 살아야지. 세상에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야지.

결국은 또 사랑 얘기.
AND

물회


옛 연인을 만났다
여관방에 마주 앉았다

오랜만이네
응, 그러네

당신은 물회 앞에서 울고
나는 당신 앞에서 오징어를 씹는다

맛이 추억처럼 비리다

언제였을까

가장 좋았던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침묵마저도 아는 새벽이다

뱃속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비릿한 슬픔이 나를 감싼다

나를 안고 울다 잠든 당신을 안고
나도 눈물 속에 잠든다
AND

이발소에서

나이 먹어도 자라는 게 머리칼이다
초로의 이발사가 아들뻘인 내 머리를 자르며
내 세월과 자신의 세월을 함께 잘라낸다
이발소에서는 정수리 냄새며 비듬같이
추한 것들을 남에게 보여야 한다
누구에게도 반말을 할 수 없는 이발사와
고개를 숙여 머리를 감고 겸손해지는 나
남의 머리를 감겨주는 두터운 손으로
떡을 주물렀어도 좋았을 것이다
나무를 만지는 목수가 될 수도
농부나 어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마술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발사에게 무방비 상태인 몸을 맡기고
세월의 무게를 덜어낸다
삶의 어디쯤엔가 닿아있던 수염까지 밀어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서는 길에
머리가 가볍다
AND

의문

의도의 의도를 알 수 있을까
무의미에 의미가 있을까
빛의 그림자를 잡을 수 있을까
소중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람도 있을까
꿈의 경계에서 헤어진다는 건 어떤걸까
인연의 끈을 놓지 않은 인연이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널 붙잡지 않고 내 삶을 붙잡을 수 있을까
마음도 인큐베이터 안에 넣을 수 있을까
나의 슬픔과 절망을 지울 수 있을까
내게도 선명하고 투명한 내일이 있을까
고흐의 해바라기는 왜 열 다섯 송이일까
얼레지는 어째서 이름이 얼레지일까
그리고 봉황은 왜 깊은 뜻을 가졌나

AND

장수 목욕탕

온탕 안에 노인 셋
나이 마흔을 먹어도
노인들 앞에선 조심스러운 것이 조선 사람
잔물결이 그들에게 파장이라도 될까
조심스레 탕에 몸을 담근다
머리가 벗어진 노인 하나
비틀거리며 탕에서 나온다
늘어진 목과 가슴과 배를 내놓고
늘어진 불알을 닦는다
꼼꼼하게 닦는다
덜렁거리는 생식기가 생의 마지막 증명일까
방탕하거나 자유롭거나 규정적이거나 완고했을 그것을 닦는다
남은 생에 무엇을 부여잡을까
노인은 시간을 붙잡으려는듯
늘어진 생식기를 부여잡았다
이곳 이름이 장수목욕탕이지
젊어지지 않는 열매는 아무 쓸모가 없지
그래도 목욕을 하고 새로 태어나야지
그리고 장수해야지

AND

술래잡기


할머니가 집을 나선다
양손에 보따리를 들었다
구부러진 허리로 구불구불 걷는다

감자밭, 고추밭을 지나
오이덩굴, 수세미 덩굴을 지나
할머니의 고무신은 막다른 곳에서 우뚝 멈춘다

할머니, 어디가세요
누구요? 난 우리집에 가오
할머니 저랑 같이 집에 가요
누군지 손이 참 곱소

할머니의 보따리를 한 손에 들고
남은 손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집에 돌아온다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
나는 영원한 술래
AND

당신 발가락

당신은 예쁘다
발가락이 예쁘다
당신의 작은 뒤통수와 복숭아뼈와 귓불도 예쁘지만
당신의 발가락은
세상에서 제일로 예쁘다
너무 예뻐서 이 세상의 발가락이 아닌 것 같다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고 싶다
담배연기를 뿜어 주고 싶다
이런 나에게 변태라고 하는 당신의 입술도 예쁘지만
당신의 발가락은 정말이지 하루 종일 쳐다봐도 예쁘다
냄새도 예쁘다
냄새를 맡으려는 나를
하지말라고 하면서 걷어차는 당신은
발가락이 예쁘다
AND

터미널 고로께
 

강화 터미널, 터미널 빵집
빵 만드는 아저씨는 바게트처럼 무뚝뚝한데
빵 파는 아주머니는 크림빵처럼 사근사근하다
터미널 빵집 고로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사줬던
태어나서 처음 먹었던 고로께 맛
열 다섯 살, 첫 데이트의 맛
그리움의 맛이 난다
내가 빵집 주인 내외의 속사정을 모르듯이
그들도 나를 고로께 총각으로만 안다
고로께라고 항상 무덤덤한 것은 아니다
어떤날에는 그들 때문에
어떤날에는 나 때문에
슬프고 힘든 고로께도 있었을 것이다
가벼운 안부를 묻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며
아주머니에게 값을 치렀어도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입가에 기름을 묻힌 날이
당신 생각에 고로께 속의 감자처럼 마음이 으깨진 날이
엄마 생각에 입가와 눈가가 함께 번들거린 날이 많았다

AND

불온


남편이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

그 여자 옆에서 신발끈을 고쳐 매고
바다에 가서 부표처럼 떠 있는 갈매기들을 보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눈빛을 마주치다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차창 밖의 이별을 만끽하고 싶다

여자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
어두침침한 천변의 자동차 안
또는 그녀의 부엌에서
남편이 있는 여자를
남편이 부서지도록 안고 싶다

무너져버린 남편에게 들켜서
여자는 나쁜년이 되고
나는 이 세상 모든 욕지거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남편에게 원 없이 얻어 맞을 것이다
피떡이 된 내 옆에서 울고 있는 여자에게
피묻은 혀로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웃으면서 말할 것이다

아내에겐 비밀로 하고
남편이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


AND

장마


모래가 흙이 되도록
바다가 넘치도록
장맛비 내린다
비가 시작한 날에 너랑 헤어졌다
모든 일에는 연유가 있고
모든 인연은 헤어져야 한다
파도, 모래, 바람, 바위, 그리고 나
네가 없어도 낯설지 않은 바닷가에서
오늘은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랍스터는 100년을 살면서
죽을 때까지 짝짓기를 한다는데
항상 새 짝을 찾으니 이별이 쉬울까
300년도 넘게 산다는 장수 거북은
오래 사는만큼 이별에도 덤덤할까
흙은 태고적부터 흙이었을텐데
비를 맞는 모래처럼
일렁이는 파도처럼
언젠간 나도 무심해 질 수 있을까
바닷속에 살고 싶다

내 마음 아랑곳 않고
장맛비 근면하게 내린다
AND

 어제 오후에 일하다가 벌에 쏘였다. 왼쪽 아래 턱에 쏘였는데, 본래 벌을 안 탔던데다가 쏘인 자리가 붓지도 않길래 대수롭지 않게 계속 일했다. 그런데 한 30분 정도 지나면서부터 온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어서 바로 퇴근했다. 왕산면 보건소에는 주사약이 없다고 해서 강릉의료원까지 내려왔다. 현장에서 의료원까지 아무리 빨리 밟아도 50분은 소요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계속 가렵고 가슴은 답답해왔다.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고 주사 맞고 약 먹고 나았다. 그 덕분에 오늘 쉬게 됐다. s형은 벌에 쏘였다가 죽을 뻔한 사람을 알기 때문에 신속하게 이런저런 대처를 해줬고 친구 j도 총알처럼 운전을 해줬다. 사무실 직원들도 응급실에 다녀갔고 집에 도착하면 내가 먼저 전화 드려야지 했던 동료들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이 타인에 대한 관심과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언젠가 손에서 미끄러진 비누가 엄지 발톱을 때렸다. 들을 사람도 없는데,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난주에 아카시아 열매를 채집했다. 집에 와서 씻는데, 뜨거운 물을 몸에 끼얹자마자 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몰랐는데, 열매 채집하면서 몸 군데군데 아카시아 가시에 긁혔던 모양이다. 그제서야 긁힌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벌에 쏘인 사건도 그렇고 직접 당하는 고통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렇게 선명하다. 하지만 남의 고통을 공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세히 밝히긴 어렵지만 지난주에 회사에서 의료보험 사건이 있었다. 우리끼리 뭉쳐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각자 납부할 돈을 내는 것으로 끝나는 진행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는 직접 고통을 받은 대상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분만 나쁜 채 참았다. 세상이 사람들을 각자도생으로 몰고 간다. 페친 전성원 선생이 본인 타임라인에 각자도생의 해결책도 각자도생인 세상에 대해서 한탄하는 멘트를 날렸다. 내 머릿속에 이민이라던가 안정적인데 취직한다던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결국은 해결책을 각자도생에서 찾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덕에서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가 시작됐다. 경주에는 방폐장이 들어섰고, 밀양에는 송전탑이 세워졌다. 강정도 그렇고 설악산, 가리왕산도 그렇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응급실의 여의사는 벌에 쏘이면 즉각적으로 대처할 방법도 없이 50분 간 차를 타고 병원에 와야하는 나의 작업 환경에 대해서 걱정하는 멘트를 하고 조심해서 일하라고 했지만 나랑 동료들은 그런건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이 간극을 메우기가 어렵다.

 모든것은 이어져 있다. 생각에만 그치지 말고 뭔가를 아주 작은 것이라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드러낼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한다. 

 요즘 얼굴보기 불편한 동료들도 생기고 했었는데, 마음을  다잡고 다 같이 잘 지내도록 노력해야겠다. 시작은 항상 가까운데서.

AND

그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를 살았다
자궁안 양수속을 부유하는 고요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지쳐 잠든 고요
결코 물리칠 수 없는 고요를 살았다
이것은 그의 고요가 부서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는 불같은 열정을 살았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아기새의 열정
온 몸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르는 사랑의 열정
절대 꺾이지 않는 열정을 살았다
이것은 그녀의 열정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와 그녀는
낮과 밤, 빛과 그림자, 해와 달
만날 수 없는 인연
그는 남풍에 실려 북쪽으로만
그녀는 북풍에 휩싸여 남쪽으로만 몸을 뉘였다
지상의 모든 바람이 사라진 밤
마침내 두 사람은 이 별의 끝에서 만났다
둘의 손끝이 닿자마자
원래 하나였다는 듯
불꽃처럼 타오르는 차가운 달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지상에는 불같은 눈이 내린다

이것은 세상 끝의 사랑 이야기


AND

결혼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걸 몰랐다
난 가족밖에 모르는데
아내를 모르겠다
두 딸은 애엄마 말만 잘 듣는다
애들 마음도 잘 모르겠다
결국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가끔 만나 서로 자기 아내 욕하던 친구는
아내랑 사이가 좋아졌는지
요즘은 얼굴 보기가 어렵다
이혼한 한 친구는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횐데
해 보고 후회하면 되돌릴 수 없으니까
안 해 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한다
아직 결혼 하지 않은 친구는
항상, 그때 이혼했어야 한다고 한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그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오늘밤도 취해서
가족들 품으로 향한다
나는 유혹에 약한 사람
어쩌면 내 아내는 고혹적인 사람
이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사실
AND

이유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좋다
바다에는 건물을 못 짓기 때문에 바다가 좋다
사람들이 다 싫고 심지어 부모님도 싫은데
나만은 좋다는 당신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데
너는 이유도 없이 나를 좋아하고
나는 그게 미안하다
깨물고 싶을 정도로 뭔가가 좋은 걸
널 만나고 알았다
나한텐 너 밖엔 없는데
부모보다도 내가 좋다는 너는
나말고 다른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유도 없이 그렇다고 한다

AND

겨울비

퇴근 후 너에게 가는 길
짧아질대로 짧아진 해가
사라지는 속도를 높이고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흩어지는 물냄새
곧 비가오려나
난는 너에게만 격정적이다
AND

우리집 - 산골 총각 이야기 -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산 18-3
우리 동네는 백복령 골짜기
할머니들만 사는 동네
사람들이 오지라고 부르는 동네
우리집은 지금처럼 혼자되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
일 마치면 쏜살같이 집에 가는 나를 보고
어떤 동료는 꿀단지를 묻어놨냐며
구들장 한 번 뜯어봐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거 뜯어봐야 그리움 뿐
관을 짜는 꿈을 꾸고서
일용직 벌이에 대출을 껴서 산 집
대출을 낀 집이라도 집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내가 장군이랑 부하랑 다 해 먹는다
내 집에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하고
대통령도 내가 해 먹으니 만수르도 부럽지 않다
나한테 뭐라도 할 사람이 한 놈도 없다
결혼하면 한 놈 생기겠지만 가망이 없다
이렇게 편한 집에서 테레비를 본다
뉴스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채널을 돌려 스폰지 밥을 보면 머리가 맑아진다
어떤 날에는 뉴스를 보다가 야동을 본다
피가 거꾸로 솟기는 뉴스나 야동이나 한 가지다
자려고 누워서 라디오를 듣는다
아버지 어머니 살아 계시던
옛날 생각이 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울면서 내가 속으로 뭐라 했는지는
나만 안다
하늘에서 날개가 내려오고
좀 있다 천사가 따라 내려왔는데
내가 하룻밤만 자고 가라고 했더니
그 천사가 우리 집에 눌러 사는 상상을 하다가
이 세상에 없는 그리운 사람을 불러내는 장난감을 생각하다가
오늘도 언제 잠드는지 모르고 잠든다

AND

그랜드 캐니언에 암매장해도 시원찮을
그랜드캐년과 그랜드캐놈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그래도 먹고 사는 게 먼저인 세상에서
부끄러운 줄은 알아서
포기라는 말은 쓰지 않고 포기해 버리는 세상에서
나는 밥도 먹기 싫고
포기해 버리는 나도 싫고
글자 나부랭이를 적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싫은 세상에서
네 마음 따라 흔들리는 내 모습이 보기 좋았다
네가 슬픈날에 난 고개를 떨구고
네가 기쁜날에 난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그러니 당신,
악착같이 밥 챙겨 먹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잠 푹 자고
포기하지 말고 웃으며 싸워라
그러면 나도,
이 싫어 빠진 세상에서
환하게 웃으며 너에게로 갈테니
AND

주말에 잘 놀고 잘 쉬었다.

친구들 모여 얘기하고 노래부르고 술 마시고 다음날 과수원에서 사과 따고 영화보고 얘기하고 노래 부르고 놀았다.

우리들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는 가난이다.

대출 받은 돈으로 가게 처마를 내리고 농사로 정착이 어려워 정처없이 이사를 다닌다. 대략 이런식이다. 어떻게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밥은 굶지 않는 세상이라지만 부끄러워서 밥을 굶을 수도 있다는 양반도 있었다. - 송파 세 모녀가 생각나서 쓸쓸해진다. -

일요일엔 아내랑 올해만 두 번 이사가야하는 상황을 맞은 분의 가게에서 커피를 마셨다. 형님은 커피도 한 잔씩 더 만들어 주시고 쿠키도 하나 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선한 사람들, 남한테 해코지 하지 않는 사람들과 주말을 보냈다.

살았으면 죽어야지.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원칙은 남한테 해코지하지 않는 것이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살았는데 살기가 어려우면 죽어도 할 수 없다, 고 생각한다.

지난주에 이계삼 선생이 '오늘의 교육'에 쓴 글( http://combut.maru.net/xe/journal_list/2327)을 몇 번 정독했다. 현재의 작은 사건들을 다 하나의 파국으로 인지하고 현재와 단절하여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무언가를 공동으로 모색하는 것이 생태적 교육의 시작이란 맥락의 글이다.

아는 형님이 '연대는 옆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여기저기 투쟁 현장에 다니신다. 가끔 아내에게 말하길 그분은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투정 부린 것이 부끄럽다.

이계삼 선생의 글은 옆에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그 이야기를 다른 곳에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그들대로 연대한 자는 연대한 자대로 현재의 파국을 잘라낼 힘을 얻는다,는 맥락이다.

가난한 우리들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고 쉬는 중에는 우리들 각자의 실패를 이야기 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분 좋은 일이다. 이런것이 연대다. 더구나 마음씨 좋은 선배 부부가 사과도 잔뜩 챙겨줬다.

박정희 예찬자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강제든 뭐든 같은 시기에 힘든 일을 모여서 한 것이 새마을 운동이 아닌가. 그렇게 형성된 박통에 대한 좋은 마음이 쉽게 사그러질리 없다. 새마을 운동 이후에는 이웃이고 공동채고 다 사라져 버렸으니 새롭게 그때와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군대에서 이유도 없이 힘든 훈련을 마치고 전우애라는 게 생기는 것이나. 노가다 판에서 하루 일을 깔끔하게 마치면 기분이 좋아서 저녁에 술 한 잔 먹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 연대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 같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새로운 개념의 연대를 해야 한다. 두물머리 친구들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릉쪽도 뭔가 명확한 것을 하진 않지만 지난 주말처럼 함께 모여 노는 것만으로도 나쁘진 않다.

술에 취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땡깡 부리고 부정적인 견해를 고집하지 말아야겠다. - 내 오래된 술버릇이다. - 내 몸이 힘들다고 나는 살아가는 것이 투쟁이야,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바지런하게 몸을 움직일 일이다. 물론 감당할 수 있는만큼만.

시도 좀 더 밝은 걸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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