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산이 온통 초록이다
초록도 다 같은 초록이 아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색이 다르다
색이 다른 것들이 모여
숲이 되고 산이 되듯이

결이 다른 사람들이
가족으로 친구로 연인으로
함께 살아 간다

그래,
너와 나는 결이 다르다

다른이의 시간에 나의 시간으로 응답할 수 없듯이
나는 당신에게 무엇으로도 응답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남이다
AND

세상의 끝에 서서
세상 끝의 단어로
세상의 끝을 설명하는 문장을 적고 싶다

해거름에 저물어 가는 인생을 보았다

세상 끝의 해거름을 보면서
세상에 없는 단어로
세상에 없는 문장을 만들고 싶다

그 한 줄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다
그 문장이 나이고 내가 그 문장이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AND

지친 몸을 쉬려 일찍 자리에 누웠다
밤이 오는 소리가 피곤하다
누워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당신이 누웠던 베개 위로 당신 얼굴이 겹친다
새근새근 당신 숨소리 들린다
그 배개를 가슴에 안고 잠들었다
무거운 쇳덩어리가 내 몸을 누르는 꿈을 꿨다
끌어 내리려 해도 발버둥을 쳐봐도
가슴의 쇳덩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깃털같던 당신의 무게가
당신이 없는 밤이
삶이
이리도 무겁다
AND

이남곡 선생 페북에서 먼저 마음에 그려지고 그대로 한다,는 문장을 읽었다. 글의 맥락은 아주 소소한 일을 하는데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대로 하니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메모장에 옮겨 적고 그 아랫줄에 결국 인간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한다,고 적었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게 아니라 먼저 그림을 그린다는 게 중요한 거라고 했다. 즉흥적으로 순간순간을 버텨내기도 하겠지만 짧게는 오늘 하루에서부터 길게는 남은 생 전체를 미리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 필부의 삶이다. 그렇다면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가 중요하다.

새벽의 페북에서 신영복 선생의 책 '공감'의 일부분을 캡쳐해 뒀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이가 살아온 인생의 결론이고 남이 바꿀 수도 없고 바꾸려고 해서도 안된다. ~ 그래서 강의의 상한이 공감이고 당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공감이 위로와 격려와 약속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내 식으로 이해하자면 결국 뭐든 저 하고 싶은대로 하겠지만 공감하면서 저 하고 싶은대로 해야한다는 얘기다. 공감을 하자면 공감할 사람이 필요하고 완고한 마음의 문도 바람이 통할 만큼은 열어야 한다.

인생이란 게 누군가와 함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누군가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물건(돈)이면 별로고 나무나 산, 애완동물이면 괜찮지 않을까? 어느날의 메모에 '사람보다 산이 좋다.'고 적었더랬다. 메모는 메모일 뿐이고 나는 사람이 좋다.


AND

큰 형이 교통사고로 죽자
어머니는 홧병으로 죽었다
둘째 형은 자살을 하고
얼마 후 아버지는 암에 걸려 죽었다.
죽은 신들이, 살아있는 나를 내려다 보았고
나는 꿈에서 관을 짰다
누군가, 관을 짜는 꿈은 집을 사는 꿈이라고 했다
그래서 빚을 내서 다 같이 살 던 집을 샀다
점심을 먹다가 식사예절 타령을 하는 동료에게 욕설을 퍼붓고 집에 왔다
일용직 처지에 대출 이자 내기도 빠듯하니 내일 또 그 인간의 얼굴을 봐야한다
셋째 형이랑 저녁을 먹었다
가족이란 게 오랜만이다
장애인 직업 재활 시설에서 일하는 형이 밥값을 냈다
누워서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잠들었다
삶이 물처럼 흘러간다
안쓰러워 하고 애쓰는 일들이 다 아무것도 아니다

AND

고요


빛의 반대편은 어둠
오른쪽의 반대는 왼쪽
어둠의 왼편은 빛의 그림자
너는 빛이 없는 곳에서 온 존재
나는 너의 그림자

너를 사랑하는 건,

너와 나만이 있는 고요
너와 내 숨소리만 있는 고요
그 조차도 사라진 고요
그 고요 속에서
텅빈 반대편을 보면서
평행선의 한쪽을 걷는 일

AND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 애인이 다가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자의 손이 내 목을 감쌌다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품안의 여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입을 맞췄다
혀가 뜨거웠다
그때 아내가 도착했다
나는 얼른 애인을 안은 팔을 풀었다
애인은 내 무릎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셋이서 인생에 대해서 얘기했다

우리는 평생 사는 일에 서툴다
AND

봄비

벚꽃 지기전에 사랑을 마치려
아침부터 고양이들이 슬프다
꽃 진 자리 언제나 참혹하다
AND

먹다


너는 나랑 기역자로 앉아서 밥을 먹고 싶고
나는 너랑 니은자로 앉아서 술을 먹고 싶다
기역을 아무쪽으로나 두 번 돌리면 니은이다
그래서
나는 너랑 기역자로 앉아서 술을 먹고
너는 나랑 니은자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마주보지 않아도
나란히 앉지 않아도
그대로 좋은것이다
친구가 함께하여 디귿자로 앉아도
거기에 한 친구가 더하여 미음자로 앉아도 좋은것이다
아무렇게나 앉아도
함께 먹는 일은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 > 5.18에 이런 걸 썼네.


AND

봉합


느슨해진 나사를 죄듯이
드라이버로 관자놀이를 조였다
삐걱삐걱 쓰걱쓰걱
기름칠을 해가며 머리를 조였다
머릿속에 가득한 당신 생각을 쥐어짰다
눈물이 피고름이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흘러나왔다
아프다
시원하다
아프다



너를 다 쏟아낼 때까지
나사 대가리가 뭉개질 때까지
머리가 반토막이 될 때까지
손에 힘을 꽉 주고 관자놀이를 조였다
그리고나서
귀를 접고 못을 박았다
눈코입을 순서대로 꿰맸다
항상 당신을 향하는 팔다리를 순간접착제를 써서 몸에 붙였다
너는 대못과 망치를 들고 내게로 오는 중이다
너로 내 상처를 봉합하던 시절이 가고
지금부터 너도 자유 나도 자유다


- > 마지막이 별로네

AND

흔한 사랑 이야기


세상에 흔한 것이 물건이다
옷이며 자동차며 아파트까지
많은 것들이 많다
널리고 널린 게 물건이고
버리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
세상에 귀한 것이 없다
흔한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들도 흔해 빠졌다
사랑도 한 번 입고 옷장에 둔 옷처럼 흔해 빠졌다
사랑한다는 말이 비 오는 날의 입맞춤이 지난 밤의 열기도 다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에 흔해 빠진 게 사랑이어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
흔해 빠져서 귀하지 않더라도
버리지 않고 쌓아두지 않고
평범하게 평범하게만
너를 사랑하고 싶다
AND

어쩌면 사랑


부엌에 난 작은 쪽창으로 담장 끝이 뜯어져 나간 자리가 보인다
그 뜯긴 틈으로 빛이 들어와 밥상 위에 올라 앉는다
햇살이 반찬이다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다


차가운 당신 발등에 따뜻한 내 발바닥을 비빈다
내 발이 당신 발을 사랑한다

너는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너는 나를 위해서 태어났고
나는 너를 위해서 태어났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듯이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가끔은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뿐이다

AND

삽당령으로 일 나간지 거의 두 달 째다. 4월 급여를 받고 나니 만취한 다음날의 허무처럼 사는 게 허무해졌다. 그러지 말아야지.

일은 재미있다. 10명이 한 팀이 되서 국유림에 나무 심고 약치고 풀 베고 열매를 딴다. 요즘은 접목한 소나무를 심고 있다.
모여서 일하다 보니 누구 보기 싫어서 일을 그만 두기도 하고 서로 견원지간이거나 모두가 마음에 안들어하는 동료도 있는듯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그 영향력 안에 없다. 다행인건가.
아직은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라면서 체념할 단계는 아니라는 얘기다.

나랑 동갑인 친구가 둘이다. 하나는 결혼해서 아이가 있고 하나는 미혼인데, 둘 다 또래 친구라고는 없는 시골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외롭다. 친구들이 더덕도 캐 주고 두릅도 따준다. 나도 그들에게 뭔가 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 집에 있던 잼을 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외롭다.는 보편적인 표현이고 이 친구들에게는 좀 더 자극적인 표현을 쓰고 싶다. 친구들은 정에 굶주렸다. 산골에서 오래 살고 산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일까. 친구들의 마음은 눈빛이나 말투 몸의 표정에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알기 쉬워서 좋다. 나도 아내에게는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알기 쉬운 사람이 되면 좋겠다.


AND

선이 굶고 섬세한 삶


어머니, 저는 선이 굵고 섬세한 삶을 살고 싶어요
아들아, 그러려므나 그런데 뭐라구?
어머니 그건 람보의 몸에 이소룡의 근육을 붙이는 것과 같아요
배리본즈의 몸에 스즈키 이치로의 근육을 달고 사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들아, 넌 숨쉬는 것도 힘들어 하잖니
오늘부터 운동을 열심히 할 셈인게냐?
어머니, 그게 아니고요 외유내강 모르세요
아들아, 너는 나한테만 강하잖니

부끄러운 아들은 숨을 죽인다

아들아, 엄마는 일하러 갈 시간이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때 보던 지리부도를 보고 계세요
아들아, 뭐라구
어머니, 그러니까 아버지는 몇 년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지도책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아들아, 바닥에 달라붙은 네가 뭘 알겠니
넌 우선 숨이나 제대로 쉬어라

아버지를 닮아 부끄러운 아들은 숨을 죽이고 굵고 가는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 4월 8일에 엄마한테 전화했다. 어버이날인 줄 알았다.


AND

낮은데로만


오른쪽이 동쪽 왼쪽은 서쪽이다
지도에는 4자가 있고 두 선의 끝이 맞닿은 곳이 북쪽이다
제삿상 오른쪽에는 사과를 왼쪽에는 배를 놓는다
나는 항상 앞으로만 걷는다
공원에는 뒤로 걷는 아주머니들도 있다
나는 항상 북쪽으로만 걷는다
오른쪽은 동쪽 왼쪽은 서쪽이다
가장 높이 나는 새도 결국은 지상에서 삶을 마친다
위로 흐르는 물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새들이 사는 높이에서 산다
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물을 마신다
그런데 나는
북쪽으로만 위쪽으로만 걷는다
앞만 보며 위만 보며 걷는다

뒤로 걷고 싶다
지도를 뒤집고 싶다
낮은데로만 낮은데로만
걷고 싶다 기고 싶다 살고 싶다

- 5월 6일 것 고침
AND

애무(愛舞)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마음이 춤을 추는 시절이었다
그 춤이
네 어깨 위에 내려 앉았다
너는 먼지를 털듯
어깨 위의 춤을 가볍게 털어내고
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의 춤을 추었다

AND

허명이어도 좋으니 명성을 얻고 싶다
나쁜 평판이어도 좋으니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다
허명과 나쁜 평판을 가지고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해서
불온한 나에 대해서 잔뜩잔뜩 적어서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벌고 싶다
이런 소박하면서 불손한 마음으로 쓴 문장을 불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해주면 좋겠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란 놈이나 너란 놈이나
다 씨발이다
씨발 소리가 절로 나오는 밤이다
이새끼나 저새끼나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씨발이다
씨발 소리가 잘도 나오는 날들이다)

하늘에 달리는 열매는 없다
물은 아래로만 흐른다
헌데
높은곳에 있는 사람은 낮은 곳을 보지 않고
낮은곳에 있는 사람은 높은 곳만 본다
끝까지 올라간 새도 결국은 지상에서 생을 마치고
하늘에 묻히는 사람은 없다

낮은데로만 낮은데로만
가고 싶다 가고 싶다
기고 싶다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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