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기름값이 싸다지만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이번 겨울은 따뜻하다
방한 텐트 안에서 잔다
잠든 아내가 이를 간다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멀리서 옆집 아저씨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담배를 태울까
텐트 밖으로 발을 뻗어본다
차가운 공기가 살갗에 닿는다
몸을 떤다
냉큼 이불 안으로 들어온다
쓰레기차 지나는 소리 들린다
가난에 대해서 생각한다
가난한 겨울에 대해서
가난한 이웃에 대해서,
새벽의 쓰레기차를 운전하는 사람과 쓰레기 봉투를 차 뒤에 옮겨 싣는 사람에 대해서
거리에서 자는 사람들과 망루와 철탑에 오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아내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뺨을 어루만진다
온기를 느낀다
이런 나를 모르고 잠든 아내가 고맙다

겨울아 겨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네 옆에 누워서 이를 갈며 자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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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흐르다


마주앉아 밥을 먹다가
흘러내린 당신의 안경을 올려준다
당신이 나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내 사랑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흘러내린 당신의 안경을 올려준다
뱃속에서 아래로 아래로만 흘러내리는 밥알처럼
안경이란 것은 흘러내리게 돼있다
사랑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당신이나 내가 빈곳과 마주보고 밥을 먹으며
당신의 안경을 올려주던 순간을
안경을 올리던 내 손끝을 떠올릴 것을 생각한다
그때,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눈물이 흘러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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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보통은 누나, 가끔은 제수씨)가 집들이 선물로 커튼을 만들어줬다. 우린 아직 집들이도 안했다. 말이 집들이 선물이고 그냥 강릉에 온 기념 선물같은 것이다. - 누나 고마워요. 집들이 한 번 해요. - 아내가 출입문의 아래쪽은 가리지 않도록 커튼 사이즈를 부탁했다. 난 예쁘기만 한데, 아내 생각엔 역시 문을 다 가리는 것이 좋았겠던가 보다. 아내는 일단 커튼을 그대로 뒀다가 계속 마음에 걸리면 손바느질로 두 개의 천을 이어서 원하는 길이로 맞추겠다고 했다.

어제 서울에 왔다. 명절과 제사 때마다 아내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내 생각엔 아내가 유리 멘탈인 이유가 가장 크다. 이유가 어디에 있던 아내가 짜증을 내면 난 그게 다 내 탓인 것 같고 결국 아내가 내 탓을 하는 것 같아서 나도 짜증을 낸다.

이 부분에서 나도 약간 멘탈 과잉이 있다. 아내가 강릉 날씨 변덕스러워, 라고 하면 나는 강릉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이 아내 마음에 안 들고 그것이 강릉에서 살자고 한 나를 탓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퉁명하게 겨울 날씨는 다 변덕스럽다. 원래 날씨란 변덕스러운 것이다, 따위의 대꾸를 하는 것이다.

아내도 미찬가지다. 내가 혼자 짜증을 내거나 욕을 할 때도 그걸 듣는 사람이 본인 뿐이니 자연스럽게 짜증이 발생한다. 우리는 이런 사소한 일들로 종종 다툰다.

부부란, 길이가 마음에 안드는 커튼을 수선하듯, 손바느질로 서로의 이질감을 한땀 한땀 꿰메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오늘 둘째 이모가 놀러오셨다. 이모는 열매가 없는 꽃은 시들면 그만이고 열매가 없으면 줄다리기를 하다가 한 번 더 생각하지 않고 줄이 끊어지도록 놔둔다고 했다. 애를 가지라는 얘기다. 마음속으로 강하게 '저희 아기 안 가질 거예요.' 라고 하면서 아내 눈치를 한 번 보고 나와 아내를 이어주는 한 바늘을 꿰멨다.

나는 시들면 그만인 것은 좋지만 줄이 끊어지도록 두기는 싫다. 그러니 아내가 결혼 같은 건 왜 했나 몰라,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제 목욕탕에 갔다가 불알을 꼼꼼하게 닦는 노인들을 봤다. 시간을 븥잡고 싶은 마음으로 늘어진 생식기를 붙잡고 있는걸까.

우리 시들면 그만인 채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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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애인과 방파제 위를 걷고 있었다. 파도의 포말이 주는 포만감에 먹은 것도 없이 배가 불렀다. 고래 한 마리가 불뚝 튀어올라 내 오른팔을 뜯어 먹었다. 고래는 배가 고팠다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했다. 구멍난 어깨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그믐달이 바다를 비추고 피를 먹은 바다는 분홍빛으로 물들었다배고픔을 몰라서일까. 팔이 떨어져나간 자리가 아프질 않았다. 왼팔로만 애인을 안고 피가 멎을 때까지, 해가 떠오를 때까지 입을 맞췄다. 나는 이제 왼손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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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부장도 새벽 네 시에 잠이 깨서 옆에 누운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이불속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스마트폰을 들여다
볼 때가 있을까?

힌과 상하차 알바를 하고 있다. 강릉 사천면에 한과 마을이 있다. 강릉 한과가 유명하기 때문에 한과 가게(공장)들 마다 명절을 앞두고 택배가 쏟아져 나온다. 나는 강릉우체국 소포영업팀에서 알바를 한다. 1톤 탑차를 타고 한과 공장들을 돌면서 물건을 싣고 내리고 5톤 탑차에 싣기를 반복한다. 12일 중에 8일 지났다.

조부장은 나를 데리고 다니는 우체국 직원이다. 조부장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그의 짝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조부장, 하고 부르는 걸 보니 소포영업팀 내에서는 꽤 높은 사람인듯 하다. 45세, 동안이고 아이 안 가지려고 했는데 그 놈의 술 때문에 아이가 둘이고, 술 안주로는 돼지고기(찌개)가 좋다고 하는 사람이다. 운전은 거칠지만 한과 사장들이 짜증나게 해도 화를 잘 안낸다. 우체국에서는 10년 넘게 일했고 그 전에는 여기저기서 살았다고 했다.(했던가?)

조부장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일할 때 나랑 합이 잘 맞는다.

그냥 이 새벽에 조부장 생각이 났다.

가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생각한다. 무엇도 결정하지 않은 삶을 사나, 생각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면 손 쉬운 대답이 되지만 그것은 사실일 뿐 현실은 아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로도 이어지지만 나에게로 가는 길을 찾기가 어렵고도 어렵다.

어제부터 치과 치료를 시작했다. 표면적인 부분부터라도 새사람이 되자.

조부장의 어금니 하나를 치료한 의사가 그 이는 가망이 없으니 쓰는데까지 쓰고 폐기하자고 했다고 한다. 폐기라는 단어를 쓴 의사를 욕하자는게 아니라 가망이 없는 이를 달고 택배 배달을 쭉 하다가 어느날 너무 아파서 그 이를 없애게 될 조부장의 삶을 생각한다. 그런것이 삶이 아닐까?

암튼 알바는 4일 남았다. 40여 만원 벌어서 이 치료비로 다 쓰게 생겼다. 그런것이 삶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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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이 복지 과잉이면 국민들이 나태해진다고 했다. 이 새끼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알바몬 사태도 기가 막힌 일이다.

교육이 중요하다.

택배 기사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 택배비가 오른다? 청소원들에게 월급을 많이 주면 건물 관리비가 오른다? 그랴서 결국 너희들이 손해다. 학교에서 이런식으로 가르치지 마라. 네 아버지가 건물 청소원이고 경비고 네 장래 직업이 택배 기사다. 나만 아니면 된다고 가르치지 마라.

담뱃값을 올린 것처럼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동통신 요금 2만원 무제한 통화나 법인세 인상 같은것들이 대표적이다. 다수의 국민들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는 일들이다. 왜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런일들을 정책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가.

정책 입안자들과 국회의원들이 어딘가 구린데가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망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고, 나라가 망해도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고 가정과 학교에서 똑바로 가르쳤으면 한다.

건강하게는 어렵더라도 건전하게는 살자.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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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전까지 우체국 택배 알바를 한다. 한과를 차에 싣고 내리는 단순 업무다. 이틀 나갔다. 알바를 하면서 갓 스무살이 된 친구들을 본다. 열심히 하려고는 하는데, 어딘가 어설프다. 처음엔 다 그런거다. 며칠만 지나면 능숙해지겠지. 나는 처음부터 능숙하다. 경험의 차이다. 다만 나는 어제 왼쪽 무릎에 통증을 느꼈다. 그 애들은 안 그럴텐데.

인간이란 종의 능력치에 대해서 말하려고 알바 얘기를 꺼냈다. 머리엔 눈, 코, 입이 붙어 있고 몸뚱아리엔 두 팔과 다리가 붙어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육체적 능력치에 큰 차이가 없다. 리오넬 메시도 공을 차고 나도 공을 찬다. 드리블을 하고 슛을 한다. 내가 좀 많이 어설프고 쉽게 지칠 뿐이다. fc바르셀로나가 팔레스타인 국가대표 축구팀에게 50대 0으로 이길 수는 없다.(20점은 가능할 것 같음.)

그러니 살아서 뭔가를 하고 있다면 남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너무 애쓸 것 없다.

삼촌 내외와 고모랑 고모부가 집에 다녀가셨다. 집들이다. 아내가 밀푀유나베를 만들었다. 맛있었다. 어른들은 좁은 집을 구석구석 둘러보셨고 싸고 깨끗하다고 만족하셨다.

당장 알바도 하고 있고 삼월엔 어디 나간다고 하니 삼촌이 덜 걱정하시는 듯 하다. 다행이다. 고모랑 고모부는 걱정보다는 조카 내외가 강릉에 이사 왔다는 자체를 좋아하셨다. (애기 때, 옥수수 먹던 사진 보러 갈게요.) 그것도 다행이다.

어제는 친구랑 술을 먹으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세상에는 사람도 많고 말도 많다. 대리비를 아끼려고 외박을 했다. 지후한테 혼났다. 미안, 앞으론 정말 안 그럴게요. 해장으로 아내랑 잿빛의 떡국을 먹었는데, 서로에게 무심한듯 무심하지 않은 중년 부부의 느낌이 났다. 저녁 먹고는 동네 산책을 했다. 우리 동네는 골목길도 예쁘고 오래된 예쁜 집이 많다.

여러가지로 다행이고 기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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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도 모르고 쓰는 말 4

새누리

새 - bird
누리 - ‘세상’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새들이 사는 높이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니 자기 눈높이에 없는 것들은 다 하찮게 생각하는가?
날지 못하는 새가 너희들 대장이란다
그러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던진 돌팔매에 날개가 부러진다




-> 뜻도 모르고 쓰는 말 시리즈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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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 일이 돈이 되는지 아닌지가 마지막 결론이고 남에게는 돈이 되는 일에 대해서 잘도 말하는데, 자신은 돈이 안되는 일만 하거나 스스로 만족할만큼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면 괴롭다. 괴로우니 자꾸 말만 늘어난다. 괴로우니 괴롭다. 이래선 안된다.

올해는 어딘가에 다니겠지만 내년에는 다시 농사를 지을거다. 강화에서는 돈이 안되는 농사를 지었으니 강릉에서는 죽기살기로 돈 되는 농사를 지을거다. 그게 내 직업이니까. 그렇지만 여전히 연간 소득목표는 천만원이다. 내 땅이 없어도 내 집이 없어도 농사 지어서 천만원을 벌면 지금처럼 그리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 물론 더 벌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일이다.

그릇의 크기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일년에 천 만원이 소득 목표인 사람에게 사 천만원을 버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되고 돈도 못 번다고 해서야 그 말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뭐라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남의 말에 민감한 때도 있는 내 아내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 내가 무척 화를 낼지도 모른다.

들기름이 꽤 많았는데 여기저기 한 병씩 돌리고 나니 딱 우리 둘이 일년 동안 먹을만큼만 남았다. 기분이 좋다. 누군가와 무엇을 나누는 건 이렇게 좋은 일이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서 애쓸 것이다.

강릉 오고 보름이 지났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났다. 결론은 여전하다. 놀 때는 같이 놀고 사이좋게 지내더라도 일은 같이 하지 말자. 나는 혼자 일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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