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30 - 포비

그때그때 2014. 10. 30. 19:59

j형한테 전화가 왔다. "야, 개 끌고와라."

포비를 데리러 집 뒷언덕으로 올라갔다. 같이 놀자고 팔짝팔짝 뛰는 놈을 일단 집 앞으로 데려왔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지후가 포비를 안고 울었다. 포비는 놀러 가는 줄 알고 신이나서 아내 눈물을 핥았다.

20여분 정도를 걸었다. 포비는 언제나처럼 앞장 서서 나를 끌고갔다. 포비는 산책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길가 여기저기에 똥오줌을 쌌다. 오랜만의 나들이라 기분이 좋았을까? 포비는 혀를 내밀고 "학학" 웃으면서 뛰었다. 걷는동안 마주친 동네분들이 어디 가냐고 물었다. 개를 데리고 이사갈 수는 없다는 얘기도 하셨다.

j형은 매듭을 만들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가 너무 커서 무서웠을까. j형이 나보고 매듭을 목에 걸라고 했다. 매듭을 목에 걸어줬다. 농협 건물 뒤쪽 언덕으로 가서 나무에 포비를 맸다. 나무에 매달리기 직전까지도 포비는 자신의 운명을 몰랐다. 편안하게 갔다.

시골개로 태어나서 시골개로 갔다. 어려서는 자유로웠지만 동네 닭들을 죽인 후에는 늘 묶여지냈다. 주인을 닮아서 야채를 제외하곤 뭐든 많이 먹었고 사는 동안 고라니도 한 마리 잡았다. '앉아.' 밖에 못 알아들었지만 우리가 주인인 것을 알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짖어도 우리에게는 짖지 앉았다. 어려서는 정말 귀여워서, 외딴섬에 이사온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작년에 볍씨 넣을 때 우리에게 달려오던 놈의 모습이 머릿속에 계속 리플레이 된다. 개를 처음 키워보는 주인을 만나서 여러가지로 불편했을지도 모르지만 대체로는 잘 지냈다고 생각한다.

오늘,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개 포비랑 안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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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 신해철

그때그때 2014. 10. 28. 00:46
가을걷이가 끝났고 주말엔 동생이 결혼을 했다. 일이 있어 시흥시에 다녀왔고 피로에 지쳐서 늦게까지 잤다. 자고 일어나니 겨울이 왔다. 마당 앞에 찬 바람이 날아다니고 벼벤 뜰이 황량하다. 고양이들은 춥다고 내 옷자락에 붙어서 울었다. 이웃집에서 점심으로 만두랑 오뎅을 실컷 얻어 먹고 와서는 또 잤다. 야구를 보다가 가슴이 답답해서 손을 땄다. 아내 손도 땄다. 내 손끝에는 검은 피가 주렁주렁 맺혔다. 속이 편해졌다. 잠시후에 신해철이 죽었다. 아내가 엉엉 울었다. 노래방에만 가면 인형의 기사를 부르던 친구가 생각났다. 나는 고딩때 노래방에만 가면 넥스트의 머니를 불렀었다. 신해철을 무척 좋아하는 친구 하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내는 계속 울었다. '마지막 인사를 할 수가 없어. 그대는 비를 맞은 슬픈 천사처럼 떠나갔네.'를 들었다. 친구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는데 하늘에 별이 많았다. 이제부턴 겨울이야.라는 듯 바람이 차가웠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을 먼저 보낸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달지도 시지도 않은 귤을 먹는 것 같은 밍밍한 슬픔일까.

세상에 나왔다가 가는 일이, 삶이란 것이 이렇게 일상속에 있다. 일상이란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이렇게 허무하고 허망한 것이다.

낮에 너무 많이 자서 오늘밤은 잠들기 어려울 거 같다.

잘 살다가 가셨습니다.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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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여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 - 망고, 지후의 종아리, 마루에 들어오는 따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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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마 정리 중이다. 올해는 흉작이다. 흉작인데 택배비는 칠천원이다. 다행인 것은 당초 예상인 서른 상자를 넘어서 마흔 상자는 나올 거 같다는 점이다. 유기농도 좋지만 한 상자에 32,000원 하는 고구마를 누가 사 먹겠나? 우리를 어지간히 좋아하거나 우리를 돕기 위한 마음이 없으면 못 사 먹는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에도 많이 팔아 주시고 올해도 계속해서 우리를 먹여 살려 주시는 j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아마 이건 못 읽으실테니까 따로 전화를 드려야겠다. -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친구 내외가 다녀갔다. 아이도 데려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개 잡으러 같이 갔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아쉽다. 섬에 왔으니 섬안주랑 술을 먹았으면 좋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조개를 못 먹으니 망둥이라도 쪄주려고 했는데 일이 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뭐 그래도 어린이가 좋아했던 것 같으니 그걸로 좋다. 이 친구랑은 어렸을 때 뜨거운 뭔가를 나누지 못하고 술만 나누어서 그런지 나이 먹어서도 계속 술만 나눈다. - 어려서 뜨거운 뭔가가 있는 사이들이랑도 요즘 만나면 술만 나눈다. - 죽을 때까지 쭉 술을 나누는 사이는 참 괜찮은 사이인 거 같다.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에 하나씩'을 정리했다. 최근에 올린 건 거의 메모 수준이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여튼 슈퍼위크를 거쳐 열 두개를 골랐다. 여기서 두 개를 더 정리하고 10개를 만들어서 다섯개씩 두 곳에 보낼 계획이다. 보내는 것까지는 계획대로 할 수 있다. -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당선되서 아내랑 맛있는 거 한 번 먹고 한 번 더 먹고 한 번 더 먹고 싶다. - 아내의 평가에 의하면 내가 쓴 글에는 삶의 정수가 없다. 맛는 말이다. 일단 삶에 정수가 없어서 그렇다. 또 죄, 엄마, 이별로 범벅이 된 글들이 많다. 그것도 맞다.

 고친다는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정신 차리고 고치자.

 다가올 이사를 생각하면 뭔가 훵하고 휑하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 법이니까, 그게 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니까 지금처럼 긍정적으로 살자.

AND

추석


섬을 나가는 뱃표를 사며
일면식도 없던 표파는 여인에게
시어머니 욕을 하던 여인이,
배 위에서 엉엉 울었다
빨간색 렌트카 안에서 울었다
아이를 옆에 읹혀 놓고 울었다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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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고등어의 몸에 날개를 달면 갈매기가 된다
그 유선형의 몸뚱아리는 스즈키 이치로의 송구만큼이나 아름답다
그 매끈한 몸이 바다와 수평을 이루며 날 때
바다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된다

갈매기한테 고등어 통조림을 먹이고 싶다

자, 바다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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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어젯밤에는 모처럼 당신 옆에서 잠을 청했네
새벽빛이 내리고 나는 당신곁을 떠나네

당신은 동굴 속의 겨울잠처럼 잠들었네
나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당신에게 입을 맞추네

내 혀가 당신 입술에 닿을 때
나라는 동굴이 허물어지네

나는 바다를 사랑하고
당신의 몸에서는 메마른 바다냄새가 난다네

우리는 열정도 없이 몸을 섞지만
사랑은 열정도 없이 몸을 섞기도 하는 것이라네

당신의 동굴을 나오며 나는 행복하네

AND

나무


사람들은 나를 지나쳐 간다
저 언덕 너머에는 바다가 있을까
누구도 뒤를 돌아 나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외롭다

사람들은 나를 지나쳐 간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몸을 떤다

저 언덕을 넘어 바다에 가고 싶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그렇지만 나는 나무
천개의 눈을 가졌지만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나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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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어원은 사람
사람의 어원은 사랑

사람은 사랑이고 사랑은 사람이다

사랑사랑해
사람사람해

사람들은 사랑사랑해

AND

벼베기


벼 벨 때가 됐다고 기러기떼가 찾아왔다
기러기들은 어째서 공중에서 짝짓기를 하는가
어째서 무리를 지어 나는가

들판의 벼가 금빛 춤을 춘다
스륵스륵 춤사위에 맞춰 사각사각 낫을 놀린다

- 어렸을 때부터 하면 그렇게 되는 거에요?
- 어렸을 땐 안 했어. 너도 한 이십년 하면 이렇게 돼
- 올해 볏값이 많이 싸다는데, 문제 없어요?
- 아, 몰라. 어떻게 되겠지 뭐.

오전 참에 한 잔
점심 먹으며 한 잔
오후 참에 두 잔
저녁 먹으며 또 한 잔 마신다

취기가 돌고
저녁달이 붉게 흔들린다

갠지스 강에서 흰 빨래를 하는 노인이 아니더라도
벼를 베고 술에 취해 잠드는 오늘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망각 속에 잠드는 오늘은
꿈 속에서도 벼 냄새를 맡는 일은
아카시아 향기 속에 모를 내고 새떼들의 군무 아래 벼를 베는 일은
이 벼로 밥을 지어 먹는 일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AND

여보


새근새근 내 옆에 잠든 사람
이를 갈며 잠든 사람
여보, 가만히 불러본다
여기보시오 친구여
여보(如寶), 보석 같은 사람, 나랑 같은 사람아
눈뜬 내가 잠든 너를 나지막이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여보

AND

믹스커피


눈 뜨자 마자 물도 마시기 전에 한 잔
어제 널 힘들게 했던 일들은 잊어
오늘은 달콤하고 향기로운 날이 될거야

아침엔 출근길 토스트랑 한 잔
점심엔 해장국 집에서 한 잔
저녁엔 소주에 삼겹살 먹고 한 잔

이발소에서 면도 마치고 한 잔
병원에서 차례 기다리며 한 잔
거래처에서 김 부장님과 한 잔

담배 태우며 한 잔
속 쓰려서 한 잔
달콤한 것 먹고 싶을 때 한 잔

커피, 설탕, 프림의 아름다운 조화처럼
그 순간 순간 조화롭게
인생은 이렇게 조화롭게 사는거야
한 잔, 한 잔 마시면서
한 고비, 한 고비 넘는거야

아버지 제삿상에 한 잔
모처럼 만난 어머니와 한 잔
당신이 그리워서 한 잔

기쁨도 슬픔도
보고 싶은 사람마저도
그렇게 커피 한 잔에 지나가는거야

AND

바람


바람이 나를 민다
바람에 밀려 걷는다

휘청거리는 내가 싫어
방향을 바꾼다

세상만물에는 인력(引力)이라는 것이 있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이 숙명이라는데

바람은 나를 밀어내기만 하고
나는 그런 바람이 야속하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우리에게 인력이 머물던 시절에
나는 바람이 되고 싶어 했고
당신은 나무가 되고 싶어 했다

바람은 그 시절의 나처럼 
나를 모질게 밀어낸다

바람, 하고 불러도
바람아, 하고 달래도
바람이여, 라며 애원해도

그것은 대꾸도 없이 나를 때리고
나는 여전히 당신의 원망을 이해할 수 없다

바람이 강하게 분다

AND

고구마 꽃


사람들에게 잘못한 일들이 쌓이면
고구마 밭에 들른다

부끄러움을 아는 나이가 되고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떤날은 너무도 부끄러워서 스스로에게 민낯을 보일 용기조차 없다

새벽에 혼자 들르는 고구마 밭은
모든 것에 솔직한 시간이다

세상에 잘못한 일들이 많아 밭에 들렀다
안개속 고라니 발자국 사이로 고구마 꽃이 피었다

꽃말이 행운인 고구마 꽃이 피었다
100년에 한 번 핀다는 꽃이 100송이 피었다

10000년치의 행운을 어찌할까
모든 잘못을 씻어 달라고 할까
복권을 살까
사업을 시작할까
이웃들에게 나눠줄까
먼곳의 친구들에게 전할까

이런 바보 같은 나를 안아주는 당신에게 전해야겠다
미안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또 고마운 당신에게 전해야겠다

꽃 지기 전에 전해야겠다

AND

석모도 - 보문사에서


연등에 달려있는 이름들
주렁주렁 매달린 풍전등화 같은 삶들
내 삶도 저들 옆에 매달아볼까

사람들의 염원이 입장료 2000원
불전 앞에 놓인 초코파이와 함께 모여든다

마음이 모여 산을 이루니 못할 일이 없지
마음이 모여 구름을 만들고 비를 내리지

하지만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지
장사 중에 마음 장사만한 것도 없지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헤헤
염불을 읽는 목소리가 슬프고 경박하다

어젯밤 누군가에게 바람을 맞았을까?
첩은 마음이 아니라 옷자락만 붙잡는다는데

염불 소리 따위 누구도 신경쓰지 않지
마음을 모으는 일이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지

AND

바램


알짜배기 땅에 알짜배기 농사를 짓고 싶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누구라도 놀러올 수 있는 흙집을 짓고
감자, 고추, 옥수수, 오이, 참외, 수박, 호박, 가지, 토마토, 당근, 콩, 참깨, 들깨, 배추, 무, 양파, 마늘을
내 멋대로 심고 길러서 내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나눠 먹고 싶다

봄이면 쑥을 캐고
가을엔 칡을 캐서
속 아프고 몸이 찬 우리 엄마에게 보내야겠다
여름이면 오디 술을 담가서
친구들과 함께 먹어야겠다
가을에는 산딸기 술을
겨울에는 뱀술을 먹어야겠다
누룩을 띄워서 막걸리도 담가야겠다
막걸리엔 꿀을 넣어 먹어야겠다

엄마는 병이 낫고
친구들과 나는 낮술에 취해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볼 것이다

집 앞에는 냇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장마비가 내리면 물과 같이 넘쳐 땅에 펄떡이는 고기를 잡아야겠다
집 뒤에는 뽕나무, 자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를 심어야겠다
나무 아래에 아버지를 모셔야겠다
철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열매를 따 먹어야겠다

집엔 손님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손님들과 함께 밭에서 일하고 함께 밥을 해 먹어야겠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솥을 걸고 닭을 잡아야겠다
나만 아는 곳에 심어둔 인삼도 닭과 함께 솥에 넣어야겠다
손님들과 같이 논김을 매다가 지쳐서
논두렁 옆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늘어지게 자는 날도 있을 것이다

봄에는 취나물을 뜯으며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여름에는 손모를 내며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우며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친구들이 술에 취해 잠든 밤에도 당신을 생각할 것이다
어느날에는 너무 생각나서 울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몸의 털이 다 허옇게 세고 머릿속도 그리되는 때가 오면
이렇게도 즐겁게 살았노라고
세상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다
그리고는 얼큰히 취해서 아버지 숨겨놓은 바로 옆 나무에 기대서
조용히 눈을 감고 싶다

아무일도 없이 살다가 아무일도 없이 간다고
나에게만 나에게만 말하고 싶다

AND

억새밭


단풍이 유행처럼 번지는 계절
숲길을 걷는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한 오후
한 사내가 억새밭에 들어앉아 울고 있다

햇살을 맞은 억새들은 은빛으로 울고
그 한 가운데 사내의 눈가도 반짝거린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주저앉아 덩달아 울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눈물도 유행처럼 번지는가
혹여, 저 사내가 내가 아닌가 생각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내는 그림자도 없고
노을아래 억새만
붉게 타고 있었다
AND

악몽 3


얼음 가시로 가득 덮힌 절벽을 오르고 있다
알몸으로 이유도 모른채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닥으로 떨어지면 날카로운 얼음 송곳들이 온몸을 관통할 것이다
차갑다
아프다
두렵다
가시에 찔린 온 몸이 피투성이다
손에서 흐른 피가 얼음 송곳 위에 붉게 물든다
아름답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올라야 한다
이제 마지막이다
최후의 힘을 짜내서 절벽 끝에 고개를 내민다
또 다른 얼음 절벽이 눈 앞에 서 있다
절벽을 오르다 떨어진 사람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다
절망이다
두 손에 힘을 빼고 아래로 떨어진다
이유도 모르고 위로 올랐기에
이유도 모르고 추락한다
이것이 꿈이라면
어서 끝내고 싶다
낙하하는 어둠 속에서 내 눈동자를 보았다
피눈물을 흘리는 내 눈동자를 보았다

AND

악몽 2


소녀와 나는 어느 방에 갇혔지
우리는 번갈아 노래를 불렀지
텅빈 변기에 머리를 집어 넣고 노래를 불렀지
이유도 모른채 노래를 불렀지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지
소녀의 아름다운 노래가 끝나면 내가 이어 받았지
우리는 언제 끝내야 하는지 모를 노래를 불렀지

어느날 나는 생각했지
어째서 계속 노래를 부르는가
우리의 노래가 끊기면 어떻게 되는걸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소녀의 얼굴이 보고 싶다
나는 소녀를 구해주러 온 영웅일지도 몰라

그날 소녀의 노래가 끝나고 나는 노래를 이어가지 않았지
나는 불안에 떨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았지
나와 똑같이 생긴 소녀를 보았지
우리의 노래가 멈춘 변기에서는 우리가 불렀던 노래가 흘러 나왔지
노래와 함께 귀가 없고 입만 달린 괴물들이 튀어나왔지
나랑 똑같이 생긴 괴물들이 튀어나왔지
우리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
그곳은 또 다른 방이었지
우리랑 같은 얼굴을 한 괴물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나는 이제 궁금한 것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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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업은 어디로 가야하나?

쌀은 정부에서 손을 놨다. - 미친놈들 - 한중 fta로 그 동안 농업쪽에서 돈이 되는 분야로 알려진 시설 채소(오이, 토마토, 파프리카) 쪽도 이제 끝물이라고 봐야한다. - 지금 농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돈 벌어 보겠다고 (시설)하우스에 투자하는 건 한 번 망해보겠다는 얘기다. - 정부에서 지금 건드리기 어려운 쪽이 한우다. 대농인 노인네들이 많은 벼농사와 달리 한우쪽은 현재 지역의 실세인 젊은 농부들이 많기 때문이다. - 젊고 돈이 있는 사람들(아버지가 지역의 대농인 양반들)이 소를 키우는 이유는 일손이 적게 들고 돈이 되기 때문이다. - 젖소 키우는 양반들에갠 미안한 얘기지만 젖소는 이미 끝났다고 봐야한다. - 우유가 남아 돈다는데도 우윳값이 일본보다 비싸다. 과잉 생산도 문제지만 결국 유통과 정부 관리의 문제다. 삼성전자 휴대폰 부문이 곧 망하게 될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

농업을 사업으로만 생각한다면 이런 현실에 맞춰서 가장 돈이 되는 쪽을 좇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하지?

오늘 페친 중애 한 분이 생협 물건도 믿을 수 없다는 글을 올렸다가 여기저기서 많이 까이셨다. 자본만을 추구하는 몇몇 생협에 이미 생산자는 없다. 생협이란 것 자체가 이미 거대한 시스템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어떤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시스템 안에 있는 생산자는 인증만 잘 받으면 된다. 내 농산물의 가격만 잘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스템 밖에 살면서 시스템 안의 삶을 누리자니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가 결국은 돈이다. 기계를 쓰지 않고 비닐도 안 씌우고 약도 안 치고 농사 지을 수 있는 면적은 한정적이고 그 생산물로 얻을 수 있는 수입이란 것은 이건희 같은 사람이 아주 비싸게 구입해 주지 않는한 맥시멈 월 50만원일 것이다. 월 50만원 벌어서 아이와 함께 셋이서 살 수 있을까? 시스템 밖에선 가능하다. 그 시스템 바깥을 갖추기 위해서는 내 땅과 내 집(겨울에 나무로 난방을 하는)이 필요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부모님이나 어느 독지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땅과 집을 갖출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농사는 뒷전으로 미루고 다른 일을 해서 돈을 벌게 된다. - 인터넷, 핸드폰 요금과 겨울의 난방비를 벌기 위함이다. - 일단 뒷전이 된 농사는 계속 뒷전으로 밀린다.

젊은이가 자본금 없이 농사 지으러 내려왔다가 다른 일로 돈을 버는 이 같은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런 생활은 아파트 사려고 몇 억씩 대출 받는 도시 봉급 생활자의 악순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지?

농업쪽으로도 아이템이 없는 것은 아니다. - 밝히진 않겠다. - 다른 일을 하면 그 일에 매몰된다. 얼른 돈을 벌어서 땅을 조금 구해야할까?

나랑 내 아내를 믿는 사람들이 생협 물건을 믿는 것보다 우리를 믿고 - 아는 사람 믿는 것이 쉬운법이다. 배신은 없다. - 내 농산물을 내가 적어낸 가격으로 사주면 좋겠다. 신토불이와 지산지소를 넘어서 '아는 사람 것을 사 먹는다.' 는 운동이 나 같은 애들을 살린다. 이 운동이 택배 시스템 안에 있다는 것은 또 다른 함정이다.

그래도 같이 좀 삽시다.

며칠 후에 캘 고구마 사달란 얘길 길게 썼다.
AND

악몽


심하게 취했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며 우산을 편다
비바람이 분다
발걸음이 무겁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무겁다
시지프스가 나와 같았을까
뒤집어 지려는 우산을 붙잡고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낸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산처럼 무겁다
10분만 걸으면 집이다
얼른 가서 쉬고 싶다
온 몸을 우산과 함께 앞으로 기울인다

나를 막아선 것이 바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비만 내린다
그런데도 우산이 뒤집힐 지경이다
대취한 줄 알았는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방금 내 옆을 지나간 미녀에게
오늘밤 시간이 있는지 말을 걸어야 한다
그러자면 발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제길

내 집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텅빈 거리에 나만 혼자 남있다
나를 막아선 것이 빗방울인 줄 았았는데
이제 보니 비는 처음부터 내리지 않았다
화가 나서 우산을 집어 던졌다
우산이 빛이 되어 달을 향해 사라졌다
중력이 사라진 듯 내 발걸음이 바람보다도 빠르다
내 걸음이 내 시선을 따라 달에게로 갔다

AND

관람차


관람차 사업을 해야겠다
어디에나 내가 만든 관람차가 돌아가겠지
그러면 나는 돈을 벌고 더 많은 관람차를 만들 것이다

지구 위 어느 곳이든 내가 만든 관람차가 돌아가고
그 안에서 연인들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겠지
짝을 잃은 누군가는 새로운 인연을 생각하겠지
위험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몸을 섞기도 하겠지
어린아이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냥 좋아하겠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자신들의 호시절을 내려다보겠지

관람차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살겠지

나와 내 연인은 관람차가 올라가는 동안 김밥을 먹을 것이다
관람차가 정상에 우뚝 섰을 때 나는 정지 스위치를 누를 것이다
새들은 날개를 인간은 무게를 짊어지고 살지만
그 순간 우리는 새들의 높이에서 무게 따윈 잊을 것이다
해는 저물어 가고 멀리 기러기 떼가 날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이야기 하고 구름 위를 걷는 키스를 할 것이다
우리의 키스는 황혼이 저물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날이 저물면 우리의 미래도 함께 저물고
우리는 그제야 땅에 내려와
그때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추억할 것이다

AND

결혼 전날


때밀이 아저씨에게 몸을 맡겼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아저씨 손길을 따라 움직이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몸을 씻고 면도를 하고 머리를 잘랐다
내일부터 새 사람이 되려고 오늘 새 사람이 됐다

어머니가 밥 먹자고 하면 밥 먹고
목욕 갔다 오라고 하면 목욕 갔다오고
양치하라고 하면 양치하고
저녁 먹으러 나가자고 하면 나가고
김치 더 먹으라고 하면 더 먹었다

그렇게 착한 아이가 됐다
엄마 말 잘 들은 하루, 결혼 전날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