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를 벴다. 2400평 베는데 세 시간 정도 걸렸다. 작년에도 그랬는데 벼 베는데 감흥이 없다. 이를테면 한 해 동안 열심히 하고 열심히 자라준 보답을 받는다는 기분 같은 것이 없단 얘기다. 농업을 직업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인가? 고구마 꽃이 피어도 그런가보다, 벼베기를 해도 그런가보다 한다. 오늘 죽든 10년 후에 죽든 큰 차이가 없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우리집에서 저녁을 했다. 작목반 형들이랑 아저씨들 말고도 동네 형들이 몇 분 더 오셨다. 아내가 고생했다. - 고생했어요. 올해의 모든 미션은 토털리 컴플리트. - 즐거운 자리였다. 노래를 하래서 노래를 했다. 내 기타에 맞춰서도 하고 아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도 했다. 밥 먹다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사람들이 시골에는 없다.고 하는 문화 생활이다. 사실 나는 영화도 잘 안 보고 티비 없이도 잘 지낸다. 게임과 책과 기타면 충분히 문화 생활이 된다. 나는 그렇지만 동네분들은 그렇지가 않다. 내 노래를 듣고 무척 좋아하신 몇몇 형들을 보면서, 쌀값은 쭉쭉 떨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니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술 마시는 거 말고 다른 즐거운 일이 있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벼는 수매하기로 했으니 이제 들깨 털고 거구마 캐서 팔면 올해 농사가 끝난다. 남들은 12월에 끝나는 한 해가 10월 말이면 끝나는 걸 보면 농부란 건 참 좋은 직업이다. 개인적으론 남들보다 덜 벌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벼베기를 마친 기념으로 쌀 개방에 대한 나의 악마적인 생각을 적어본다.

쌀개방은 이미 다가온 현실이다. 땅만 가지고 있는 상태로 농사일의 거의 90%를 영농대행으로 벼농사 짓는 노인들은 쌀개방과 함께 지금까지의 농사 방법이 의미를 잃게 된다. 이것 저것 대금 주고 가을에 내 쌀이다.라고 하며 벼농사 짓는것 보다 도지쌀 받아 먹는 것이 더 이익인 싱황이 되는 것이다. 그네들이 내놓은 땅을 하나하나 확보해서 도지 주고 농사 짓는 평수를 몇 만평 씩 늘린 대농들은 결국 기곗대 때문에 현상 유지가 고작일 것이다. 이 대농들도 점점 나이를 먹고 벼농사에서 손을 떼겠지. 그런 중에 나는 벼농사를 시작할거다. 내 손으로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5천평 정도가 좋겠다. - 물론 벼농사는 하늘이 짓는다. - 토종벼를 심어서 적절한 값에 직거래를 하고 기계는 기술센터에서 빌려 쓰기로 한다. 그렇게 몇해가 지나고 수입 쌀값이 무척 많이 오른다. - 지금도 미국쌀이 그렇게 싸진 않고 초대형 자연재해의 빈도는 점점 높아지는 추세다. - 돈은 그때 벌어야겠다. 물로 계속 내 쌀을 사 먹던 사람들에게는 계속 비슷한 값으로 쌀을 팔 것이다.

봉화의 어느 정미소에서 80킬로 한 가마에 155000원 줬다는 글을 읽었다. 정미소에선 거기에 삼만원 정도 더 얹어서 팔겠지. 어느 정미소에소는 수입쌀도 섞어서 팔겠지. 80킬로면 도시의 맞벌이 부부가 일년 먹고도 남는다. 쌀 값이 상식을 벗어났다. 농업을 버린 이 나라도 너무도 싼 쌀 가격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국민들도 언젠가 후회할 거다. 그리고 그 후회의 순간까지 나는 묵묵히 벼농사를 지을 거다.

나의 다짐이 되버렸네.

우리나라 젊은 소농들 파이팅.
AND

데이트


6월, 대관령 양떼 보러 가는 길
차창 밖의 산들이 여름산이 되어간다
나도 산처럼 봄에는 봄이 되고 여름에는 여름이 되고 싶다

- 오늘 휴게소 날씨가 참 좋네요
- 그러네요
- 구름은 사람들의 소망이 모여서 생기는 거 아세요
- 그런가요? 마음들이 예쁜가 보네요.
- 저희 집에 어미 없이 자란 고양이가 있어요

그 고양이가 태초부터 엄마였다는 듯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듯
산이 구름의 그림자를 품고 있다

당신 옆에 누워서
손을 잡고 나란히 누워서
나무가 되고 싶다
당신 품에 안겨 나무가 되고 싶다
산이 되고 싶다

AND

협의이혼 2


어머니는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하고
아버지는 상기된 얼굴로 웃는다

지방법원 대기실에
한 이불에 들던 사람들이 잔뜩 들어앉았다

법이라는 이름 앞에 엄숙해진 사람들은
판결의 시간만을 숨죽인 채 기다린다

꿀꺽,
어디선가 침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쾅쾅쾅

법원문을 나서는데 우연처럼 비가 내린다
사람은 셋인데 우산은 하나다

방금 이혼한 두 사람이 자연스레 한 우산 아래 든다

아버지는 이제부터 미쓰 김이라고 불러야 하냐며 농을 치고
어머니는 배꼽을 잡고 웃는다

불안한 마음에 밤은 지샌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의 품에 들었다

바다에 노니는 푸른 생선 같았을 두 사람의 꿈이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 되어 흩어진다

나는 두 사람의 꿈에 갇혔다

AND

볼음도 생활 - 뻘그물(건강망)


저마다의 호시절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하며 갯벌에 나간다
대통령이 누구였건 시절이 어땠건
젊은 몸뚱이를 마음껏 부리던 그때가 호시절이다

밤새 망둥이 배를 땄던 일
가오리를 잡다가 쏘였던 일
한 경운기 다 싣고도 넘칠만큼 밴댕이를 잡았던 일
담배를 안 챙겨 나와서
갈매기가 그물에 든 고기 다 뜯어 먹거나 말거나
바다 가운데서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나갔던 일
경운기가 뻘에 빠져서 맨몸으로 혼자 걸어 돌아온 일
경운기 안에서 잠이 들었다가 바닷물이 들어와서 죽을 뻔 했던 일
어느해에 복어를 먹었다가 같이 먹은 사람 중에 자기만 살아난 일

가장 슬픈 일은
조개잡던 어머니가 바다에서 돌아가신 일

비바람이 불고 안개가 바다를 사로 잡아도
무엇에 사로 잡힌 듯 하루에 두 번씩 바다에 나간다

오늘은 어떤 게 잡혔을까?
귀한 생선은 식구들이랑 먹어야지
암만 흉어라도 반찬거리는 잡겠지
누구네보다는 많이 잡았으면 좋겠는데

저마다의 호시절은 지났어도
저마다의 생각으로
하루에 두 번,
물 때를 맞춰 바다에 간다

AND

아내


핵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
갓초경을 한 소녀의 몸을 가진 발가락이 예쁜 사람
달팽이가 입술을 걷는 듯한 키스를 건내는 사람

운명을 믿는 나
그 운명에 약간의 틈이 생겼을 때, 그 틈으로 들어와 내 운명이 된 사람

당신을 보면 너무 좋아서 이를 앙시물게 된다
어떤 야동은 너무 몰두해서 보게 되는데, 당신에게 미안하다

나는 똥두 싸야되구 오줌두 싸야되구 싸야될 게 많아
더럽구 웃기다며 당신이 웃는다

가끔 당신은 운다
당신이 울면 나도 운다

하루끝, 피곤한 당신은 이를 갈며 잔다
나는 그 옆에 누워서 당신 정수리에 손을 갖다대고 잠든다

모든것이 완전한 시간, 이것이 사랑

AND

빚더미


땅을 사려고, 집을 사려고, 차를 사려고,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아이를 학원에 보내려고 돈을 빌린다
집과 땅은 안 팔리고 차는 중고가 되고 흰 쌀밥에 간장만 비벼 먹어도 맛있고 아이는 공부가 싫다
땅이 안 팔려서, 집이 안 팔려서, 차가 헐값에 팔려서, 집에 쌀이 떨어져서, 그런데도 아이 학원은 보내야해서 돈을 빌린다

빌린 돈으로 빌린 돈을 갚는다
빌린 것 없이 태어나 빌린 삶을 살고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몸뚱이를 버린다

너도 나도 빚더미
우리 모두 빚더미
나라도 빚더미
세상도 빚더미
어차피 빚더미

빚은 삶에 덤으로 얹히는 것
삶은 빈손으로 태어나 마이너스로 가는 것

그래도

월급 받아서 월세를 살았더라면
버스를 타고 다녔더리면
옆구리가 미어져 나오도록 먹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마음껏 놀게 놔뒀더라면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이
건물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날들이
다리 위를 지날 때마다 생기는 어떤 마음이

지금보다는 적었을텐데

AND

황소인력


김포시 대곶면 황소인력 
황소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고
수군거리고
커피를 마신다

장맛비 내린다
어제부터 내린 비로 바닷물도 불었다
비를 맞은 소들은 할 일이 없다

사람들은, 건물벽에 바짝 붙어서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피우고
바닥에 침을 뱉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수군거리고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

사람들은, 눈을 끔뻑이며
해가 뜨기를 황소가 되기를 기다린다

AND

여름 - 바닷가에서

노인들도 조심스럽게 쌍쌍바를 가르고
아토피 어린이도 쭈쭈바를 먹는 계절
누구든 붙잡고 시원하게 한 대 치고 싶은 더위
식어버린 냉커피를 파는 할머니
방파제 위를 사라질 듯 걷는 젊은 연인들
아빠 손을 잡고 뒤뚱거리는 아기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낚싯대
바람에 날리는 붉은 원피스의 끝자락
잘록한 허리 아래 그것을 추스르는 몸짓
벤치에 애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가려지지도 않을 흰 다리를 가리는 여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홀짝홀짝 사라지는 구름 조각들

사람들은 바다에 오면 바다만 보는데
나는 바다를 보면 당신만 생각납니다

AND

 오늘은 내 생일이다. 심은하, 이미연 누나도 오늘이 생일이다. 몇 개의 생일축하 연락을 받았다. 생일이란 그런 것이다. 아내가 미역국을 끓여줬는데, 못 먹었다. 벼베기를 시작 했기 때문이다. 오늘치 일을 마치고 k누나네 가서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내 생일날 벼를 벴다. 벼로서는 오늘이 죽는 날이기도 하지만 새로 태어나는 날이기도 하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벼의 일생을 가지고도 한참을 적을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어쩌다보니 저녁 먹는 자리에 주수형, 정훈이형, 완이형, 나, y이장님, 그리고 동네 형들 두 명까지 꽤나 여럿이 모였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어지간히들 취했다. 형들은 올해 작황, 쌀 판매 대책, 배 타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마른벼의 운송비 문제, 젊었을 때 이야기들을 했다. 나도 중간중간 끼었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다. 내가 사랑하는 시간이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시간이다.

 

 얼마전에 강릉에 갔다가 게스트하우스 앞마당의 자전거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을 봤다. 우리동네는 밤에 문 잠그고 자는 집도 거의 없다. 심지어 우리집은 문이 잠기지도 않는다. 다시 통제의 영역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자고 동쪽 끝에서 서쪽의 땅 끝까지 와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바람에 떠나가는 마음이 이다지도 무거운 것일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이 문제다. 개 병신 같은 사람들을 만나도 문제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떠나려는 마음에 계속 돌덩이가 툭툭 떨어진다. 무겁고도 무겁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고마운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제대로된 감사를 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싶다. 산 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은 요즘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특히 더 강하게 나를 때리는 2014년 9월의 어느날 내 36번 째 생일이다.

AND

 김영하가 읽어줬을 때부터 읽고 싶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10개 중에 표제작이 가장 좋고 그 표제작이 정말정말 좋다.

 

 p.127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 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기론,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할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게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로버트는 거의 10년 동안 내가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가끔은 그에게 말을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10년이 되었고, 그동안 우리는 유산, 파산지경 그리고 시부모님의 죽음을 지나왔다. 이제 나는 우리가 함께 헤쳐나갈 수 없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그 사실을 내면화하여 속으로만 삭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도 그는 아마도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을테고, 내게서 로버트에 대한 감정을 듣는다고 해도 내게 상처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할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나의 비밀은 무엇일까? 인간은 비밀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모든 예술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에서 나온다.

AND

울었다 2


당신을 생각하다가
술에 취했다
오토바이에 올랐다
평소엔 넓던 길이 점점 좁아졌다

아프지 않다
일으켜 세우는 오토바이가 무겁다
이런, 피가 나잖아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정말 아프지 않다
이런, 피가 멈추질 않는다
그래도 아프지 않다

길이 좁으니 조심해서 가자
아프지 않다
를 되내이며 집에 왔다
아픈것을 참으며 몸을 씻었다

아프다고
아프다고
너무 아프다고
옆에 없는 당신을 붙잡고 울었다

 

울었다 1

AND

불안


손톱끝이 엉망이다
어제도 엉망이 되도록 마셨구나
돌아오던 길의 기억은 없지만
아기가 어미젖을 빨듯 손톱끝을 물어 뜯은 기억만은 생생하다

동지 지나고 해가 길다
어느덧, 문득, 어느샌가, 돌아보니
해는 길고 나는 어른이라 불린다
자고 일어나면 새는 울고 날은 바뀌고 해는 길어진다

그러다가 나는 사라진다
사라지니까 사람이다

오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아침
어딘가에서 들려올 불행한 소식을 기다리며 담배를 피운다
휴대전화 안에는 불행들이 넘쳐난다
다행이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세상을 향해 분노의 헛발질을 하는 내 모습에 헛구역질이 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AND

있었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휴지에 묻어 나오는 똥처럼
날이 지나고 지나도 자꾸자꾸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메뉴도 간판도 없는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손을 잡고 천변을 걸어보기도 전에 끝나버린 연애가 있었다
해바라기 향기가 나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개 물그릇에 나뭇잎을 띄워주던 마음이 있었다
내게 발가락을 내어줄 것 같던 사람이, 돌이 될때까지 말없이 나를 안아줄 것 같던 사람이

있었다
AND

협의이혼


오늘은 우리엄마 미쓰김 되는 날
부모님과 함께 법원에 간다

법원 문을 나서며
아버지가 밥을 먹자고 한다

마침 장날이다
사람들이 택배처럼 장터로 쏟아진다

방금 이혼한 두 사람과 그 아들이
시장 구석의 순댓국집에 앉는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부부가 자주 먹었다는
말캉한 고깃덩어리와 뜨거운 국물을

한때 내장까지 쏟아낼 것처럼 사랑했을 두 사람과
서른을 훌쩍 넘긴 그들의 큰 아이가

30년 전의 그때처럼 셋이서 먹는다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

아버지는 ‘특(特)’으로 먹는다
나와 내 어미에게는 여전히 그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엄마랑 나는 보통으로 먹는다
하지만 나는 보통으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모른다

각자의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우리는 각자의 세계로 흩어진다

무거운 하늘 위로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간다

AND

무방비


벌에 쏘였다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당했다
엊그제 집안의 벌들을 태워 죽였다
그네들도 급작스럽게 당했다
자식을 잃은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따끔했던 손 끝이 아리고 또 아리다

인간이고 곤충이고 다 무방비다

발정났던 고양이가 울음을 그쳤다
며칠만에 나도 녀석도 집안도 조용하다
온기가 그리웠을까
내 품에 안겨 그르렁댄다
차마, 저린 다리를 풀지 못했다

인간이고 동물이고 다 무방비다

화력발전소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배가 기울어 사람들이 물에 잠겼다
공장에서 일하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 죽었다
군대에서는 사람이 맞다 죽기도 한다
어제 나는 아차, 하는 순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떨어지고 잠기고 죽어가는 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인간이란게, 인생이란 게 다 무방비다

AND

볼음도 생활 - 조개잡이


조선시대 임금님도 먹었다는 상합을 캔다
조개중에 으뜸이라 하여 上字를 쓰는 상합을 캔다
질기기만 하고 맛이 없어 우리들은 잘 먹지 않는 상합을 캔다
바다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상합을 캔다
백까지 빛깔이 나서 백합이라고 블린다는 상합을 캔다

먹지도 않을 거 맛이야 아무려면 어때
많이만 잡으면 그만이지
조갯값만 으뜸이면 그게 상합이지

일년에 단 한 번 북한 땅이 보이는 갯벌에서 상합을 캔다
캔 것을 지고 나갈 힘이 없는 노인들도 캔다
부부가 함께 나와서 캔다
아이도 데려와서 캔다
쉬지도 않고 캔다
땅만 보고 캔다

떼돈을 줘도 내일은 안 나온다는 일
그래놓고 떼돈을 안 줘서 내일도 나오는 일
다리에 마비가 오고 온몸에 뻘흙이 묻어도 조개 꾸러미를 짊어지고 나와야 하는 일
굴껍데기에 발바닥이 다 찢어져도 내 힘으로 뭍으로 나와야 죽음을 모면하는 일
다음날 아침 뱃터에서 내가 제일 많이 잡았다며 자랑해야 하는 일
모두가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되는 일
꿈이 되는 일

AND

마음 치료기(마음 회복기)


다친 마음, 슬픈 마음을 치료해드립니다. 들뜬 마음을 가라 앉혀 드립니다. 마음속의 안타까움을 없애드립니다. 사랑의 열병을 지워드립니다. 어떤 마음이든 회복해 드립니다. 하얗게 만들어 드립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원하십니까? 당신의 마음을 제 안에 넣고 눈을 감으세요. 마음의 뿌리까지 꺼내주세요. 그래야 제가 정상 작동합니다. 삶이 두려움 뿐이세요? 저에게 당신의 두려움을 주십시오. 삶에서 달아나고 싶으세요? 달아나기 전에 저에게 오십시오. 원망과 탄식 불만과 상처들을 다 잡아 삼켜드립니다. 구름이 해를 가리듯 지워드립니다. 비용은 받지 않습니다. 저는 마음만을 먹고 사는 괴물이니까요.
AND

내 친구들의 불안함에 대하여


모두가 취한 밤

친구가 친구의 자지를 빨았다
- 야 너 이 새끼 죽을래
친구끼리니까 괜찮겠지. 생각했다
자지를 빨린 친구는 뼈까지 토해낼 듯
먹고 마신 것을 쏟아냈다

친구가 친구의 입술을 훔쳤다
- 이 새끼 혀 집어넣었어
친구끼리니까 정말 괜찮은걸까. 생각했다
친구라도 괜찮지 않은 것이 있다
친구의 주먹에 친구가 나가 떨어졌다

다들 결혼생활이 불만이라고 했다
누구는 애 때문에 살고
누구는 바람을 피웠고
누구는 바람을 피우고 있고
누구는 생활비의 대부분을 유흥비로 쓴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가 친구의 자지를 빨았다
친구는 요리사다
친구의 자지를 빨 때
친구의 눈빛은 요리를 할 때처럼 반짝거렸다
친구의 혀는 불판에 고인 삼겹살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이런 밤에 나는 혼자 말똥말똥하다
나만 혼자 죄를 지은 것 같다

한 친구는 집에 돌아오면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자기 삶에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친구는 어떻게 잘 풀리는 애들이 하나도 없냐고 했다
나는 가난하지만 뭐든 잘 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친구가 어이구. 라고 했다
내 이름은 어일운데. 라고 내가 말했다

친구가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ㅡ> 예전에 써둔 것. 


AND

공장에서


이력도 모르는 사내들과 점심을 먹는다
사내들은 선량한 몸을 가졌다
그 사내들과 저녁도 먹는다
선량한 몸을 가진 사내들끼리는 말이 필요없다
씹지도 않은 밥을 뭉개듯 삼키고
사내들은 다시 일을 시작한다
덜컥덜컥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밥이 내려간다

땀에서 맹물 맛이 날 때까지 일을 하면
누구와 몸을 섞어도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이력도 모르는 선량한 몸을 가진 사내들은 애인이 없다

- 오늘도 특근이구나
- 월급날에는 부러지게 마셔야지
- 다음 달에는 차를 사고 내년엔 집을 사야지
- 그 다음엔 결혼을 해야지

우리들은 간식으로 나온 빵을 씹으며 미래를 생각한다
나도 사내들도 꿈과 함께 살고 있다

불이 꺼지지 않는
공장에서

AND

빈 머리


내 아내는 머리가 비었다
내 머리에는 빈틈이 없는데

ㅋㅋㅋ ㅋㅋㅋ

내 아내는 이마가 넓다
내 이마는 좁은데

ㅋㅋㅋ ㅋㅋㅋ

내 아내의 머리는 이리 넘기면 이리 비고 저리 넘기면 저리 빈다
내 머리는 이리 넘겨도 빽빽하고 저리 넘겨도 마찬가진데

ㅋㅋㅋ ㅋㅋㅋ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는데 내 아내는 머리가 비었다
나는 내 아내의 텅빈 머리도 사랑하는데
내 아내는 자기 머리를 쓸어 넘기는 나를 향해 죽인다고 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ㅠ.ㅠ

내 머리칼을 모두 심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내 옆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
AND

덜 취해서 쓰는 낙서


우리가 우리의 슬픔을 다 알 때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것을 다 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매일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까지만 살아가는 것이다

AND

내꺼


뭐든지 다 내 것이 좋은 거야
논도 밭도 경운기도 트랙터도 이앙기도 콤바인도
내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거야

그래서 다들 내껄 가지려고 하는거야
사랑도 미움도 그리움도 기쁨도 슬픔도
그리움이 슬픔이 되는 일은 별일 아니지만
죽음은 내 것이 아니었으면 해

뭐든지 다 내 것이 좋은 거야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아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도 내껀 좋은 거야
아,
아내는 남의 것도 좋은 거야

뭐든지 다 내 것이 될 수 있는건 아니야
그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는거야
그래도 죽음만은 내 것이 아니었으면 해

그리고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더라도
그리운 당신은 내꺼였으면 해
AND

봄밤


4월의 첫날, 밤마실을 나선다
오늘은 만우절, 농담처럼 눈이 내리고
산수유 꽃망울 하얗게 덮는다
눈을 맞은 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눈이 내리는 잊을 수 없는 봄밤
바람은 무릎위로 빠르고
바람을 맞은 내 맘은 휘청거리는 나비의 날갯짓
눈,
내리다 그친 봄밤
애인과 첫키스를 했던
친구와 흥청망청 술을 마셨던
혼자서 울기도 했던

봄밤


-> 언젠가 적어둔 것
AND

당신


구름을 쫓던 길에 당신을 만났습니다
누군가에게 등을 돌린날 당신을 만났습니다
손을 잡고 강가를 걸어보지도 못하고 끝난 연애를 생각하다가 당신을 만났습니다

구름 사이로 손을 뻗어 당신을 잡았습니다
등을 돌린채 울다가 울음을 멈추고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벚꽃 흐르는 강가를 걸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다가 당신을 만났습니다
당신을 당신을 생각하다가
당신을 당신을 만났습니다
AND

명절 - 과식(꾸역꾸역)

고기 구워 먹자
잡채 먹자
갈비찜 먹자
저녁에 뭐 먹을까
(또 먹어요?)

엄마가 주는대로 먹는다
꾸역꾸역 먹는다

가족의 증명은 과식
거푸 먹는 술에 취하듯
꾸역꾸역 집어 넣은 엄마 손길에 체했다

이리와 돌아 앉아봐

바늘이 손을 찌르기도 전에
엄마에게 내맡긴 등짝이 편안하다

함께 먹는 것이 사랑이다
내 등짝을 쓸어내리는 손이 사랑이다
AND

겸손

 

난 겸손하지
높은 놈과 악수를 할 때처럼 두 손으로 밥을 먹지
한 손으로 거들먹거리며 밥 먹는 놈들과는 다르지

난 겸손하지
내 손으로 밥을 차려 먹지
거만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누군가를 부르는 녀석들과는 다르지

난 겸손하지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고개를 숙여 머리를 감지
미용실에서 고개를 뒤로 빳빳하게 세우고 남에게 자기 머리를 내 맡기는 종자들과는 다르지

난 아주아주 겸손하지
고무신을 신고 누더기를 걸쳤어도
누구에게도 굽신거리지 않지

난 누구보다도 겸손하지
대통령을 김 씨, 이 씨, 박 씨라고 부르고
그들은 날 모르지

그래서
난 겸손하지만 때론 우울하기도 하지

그렇지만
너희들은 모르는 겸손을, 나는 알지

AND

춘분


봄가뭄에 아내가 울었다
울다지쳐 잠들었다
새우처럼 웅크렸다
살그머니 다가갔다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뒤에서 안았다
온기가 전해진다

오늘은 춘분
바람이 불어 별이 많았다
바람이 불어 별이 떨어졌다

AND

농민 신문 신춘문예 공고가 났다. 불손한 마음으로 300만원에 도전해야겠다. 시라고 쓰고 시로 읽으면 시가 되는 것이 시다.


명절 - 간장밥 이야기 -


뱃터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할머니들의 동네에 자가용들이 부르릉
젊은 얼굴들이 동네를 두리번두리번

나는 외롭다

흰 쌀밥 한 주걱에 s표 진간장 한 숟갈 주르륵
참기름 반 숟갈 더해서 쓱싹쓱싹 비벼서 쓱싹쓱싹 먹는다
간장밥은 참기름으로 비벼야 맛있어.
엄마가 말했다
어린것이 기름맛을 알았을까?
나이 먹고도 엄마한테 배운대로 먹는다
엄마의 맛, 집밥의 맛, 고향의 맛이다
바다 건너 보고 싶은 맛이다
엄마가 보고 싶은 맛이다
울면서 먹는 맛이다


간장밥을 자주 먹는다. 반찬 꺼내기가 귀찮아서 그렇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엄마가 나에게 간장밥을 해줬더랬다. 여러번 해줬겠지? 간장은 샘표 진간장이 맛있고 간장밥은 들기름이 아니라 참기름을 넣고 비벼야 맛있다고 했던 단 한 번의 기억 때문에 나이 먹고도 간장밥을 먹는다. 이제는 기름맛을 알까?
AND

정말 올해가 다 갔다.

오늘은 추석맞이 동네 풀베기를 했다. 하루 빡세게 일하고 나흘 설렁설렁 일한셈 친다. - 옘병, 어디에다 감사할 진 몰라도 감사합니다. - 일 마치고 술을 마셨다. 오후 한 시에 새벽 한 시 만큼 취했다. 그리고 동네엔 빗방울이 떨어진다. 말라 비틀어진 논에 도움이 될거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이 순간에 나는 불안하다.

두 명의 친구랑 통화를 했다. 한 놈은 춘천에 한 놈은 강릉에 산다.

무릇, 사람이란 자기 마음이 편한 곳에 사는 게 제일이다. 두 친구 모두 그렇질 않다. 또 사람이란 자기 편한대로 사는 게 제일이다. 두 녀석 모두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러자고 강릉으로 이사 가려는데, 그렇지 않은 친구들을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죽을때까지 계속된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도 변하지 않는 명제다. 이 두 가지가 상호작용하며 개인의 삶을 정한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 있는가?
엘시노어여,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질문은 끝나지 않고 대답은 반복된다. 이 반복을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세계의 질서는 깨지고, 나도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기 위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사라진다. 사라진다

고구미가 여기까지 생각했을까? 두렵다.

존재하지 않는 영원까지 언제까지라도 마시고 싶은 오후다.

예초기로 풀을 잘라낸 오후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