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2014/07/20 | 2 ARTICLE FOUND

  1. 2014.07.20 20140720 - 밀알, 콩알
  2. 2014.07.20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

아내에게 우리가 이 좆같은 세상에 밀알이 되자.고 했다가 지랄 똥 싸네.란 대답을 들았다. 밀알은 종교색이 느껴져서 싫고 자기는 밀알이 아니라 콩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에 나온다. 밀알이나 콩알이나 마찬가지다. 땅에 떨어져 썩어야(낮게 살아야) 열매를 맺는다. 권정생 선생님을 생각해본다. 일단 물건을 줄이고 가난하게 살아야 밀알이든 콩일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굶어 죽진 말아야겠지. (요즘도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내가 이 말을 꺼냈던 것은 농사를 짓고 이번 생을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 최소한의 밀알이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지후야. 우리가 이 거지같은 세상에 콩알이 되자. 기왕이면 토종 콩알이 되자.

줄리언 반스의 levels of life를 읽고 생각한건데, 20대 때의 나는 사랑에 30대인 지금은 삶의 유한성(죽음)에 천착하고 있다. 더 이상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지후 때문이다. 고맙다. 남에게 보이는 내 모습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내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어느날 지후가 사라진다면 우리가 닿아있던 모든 순간들이, - 내가 티셔츠를 뒤집어 까고 등을 갖다대면 지후가 등을 긁어준다. 컴퓨터 앞에 앉은 아내의 좁은 등에 커다란 내 발바닥을 갖다댄다. 화가 나서 마우스를 쾅쾅 내려치는 네 옆에서 나는 어쩔 줄 모른다. 잠든 그녀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갖다대고 나도 잠든다. - 그러니까 나의 모든 삶이 나를 잃은 것 같은 부재감으로 가득차지 않을까? (줄리언 반스는 그의 아내가 자기 심장의 생명이라고 했다.)

내년에 강릉으로 옮길까 한다.

내년에는 논에 들렀다가 오는 길에 잔뜩 주워 먹는 산딸기도, 집 옆의 우물도, 마을 회관에서 매일 점심을 먹는 겨울도, 장구지 아이(새댁)란 호칭도, 길가에 지천인 인동초와 달맞이 꽃도, 한적골 가는 도중에 있는 원시림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콩알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응? 지후야.


요즘 머릿속에 비 생각이 가득차 있어서 '비'가 '지후'를 밀어내려고 한다. 걱정이다. 그러니 비여 온몸을 열고 춤을 추며 오라. 너라도 내려야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이 조금은 깨끗해 질 것 같구나.

AND

 작년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좋게 읽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예감이란 것은 자신의 무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에 거의 틀리지 않는 법이다.)


 올해는 이 책을 읽었다. 아내의 죽음 이후의 생각에 대해서 쓴 에세이다.



p. 120 ~ 

 그렇게, 분노로 인한 문제가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 분노를 느낀다. 인생을 포기하면서 그들을 저버리고 배신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비이성적인 생각이 또 있을까. 기꺼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자살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별의 아픔을 겪으며 신을 원망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비이성적인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우주를 원망하는데, 사별이 불가피하고 돌이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내가 느낀 감정은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2008년 가을 내내 나는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무심한 마음으로 신문을 읽었고 티브이 스포츠 경기를 챙겨 보았다. '뉴스'라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버스를 꽉꽉 메운 예의 나태한 승객들, 자기밖에 모르는 그들의 유아론과 무지의 상태를 실어나르는 동력원을 더 확장하고 더 모욕적으로 강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선가 나는 오바마의 당선에 죽자고 신경을 쏟았지만, 다른 세상사에는 일절 관심을 끄다시피 했다. 금융체제가 붕괴되어 불타오를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었지만 나에겐 대수롭지 않았다. 돈이 아내를 살려낼 수 없었다면, 돈의 효용가치가 도대체 무엇이며, 또 닥친 화를 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가? 기후 문제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고들 했지만, 내 관심사의 범위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차를 운전해 병원에서 집까지 다녔는데, 철도교가 나타나기 직전의 어느 길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나는 소리 내어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하고 했다. 

 "이건 그냥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바로 '이것', 이토록 거대하고 강렬한 '이것'이 '모든 것'의 이유일 뿐이었다. 그 말엔 어떤 위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말은 가짜 위안에 저항하는 대안이었는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가 다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우주 자신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을 터이니, 우주 따윈 될 대로 되라지. 세상이 그녀를 구할 수도 없고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세상을 살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이 부분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어떻게 살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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