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우리가 이 좆같은 세상에 밀알이 되자.고 했다가 지랄 똥 싸네.란 대답을 들았다. 밀알은 종교색이 느껴져서 싫고 자기는 밀알이 아니라 콩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에 나온다. 밀알이나 콩알이나 마찬가지다. 땅에 떨어져 썩어야(낮게 살아야) 열매를 맺는다. 권정생 선생님을 생각해본다. 일단 물건을 줄이고 가난하게 살아야 밀알이든 콩일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굶어 죽진 말아야겠지. (요즘도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내가 이 말을 꺼냈던 것은 농사를 짓고 이번 생을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 최소한의 밀알이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지후야. 우리가 이 거지같은 세상에 콩알이 되자. 기왕이면 토종 콩알이 되자.

줄리언 반스의 levels of life를 읽고 생각한건데, 20대 때의 나는 사랑에 30대인 지금은 삶의 유한성(죽음)에 천착하고 있다. 더 이상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지후 때문이다. 고맙다. 남에게 보이는 내 모습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내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어느날 지후가 사라진다면 우리가 닿아있던 모든 순간들이, - 내가 티셔츠를 뒤집어 까고 등을 갖다대면 지후가 등을 긁어준다. 컴퓨터 앞에 앉은 아내의 좁은 등에 커다란 내 발바닥을 갖다댄다. 화가 나서 마우스를 쾅쾅 내려치는 네 옆에서 나는 어쩔 줄 모른다. 잠든 그녀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갖다대고 나도 잠든다. - 그러니까 나의 모든 삶이 나를 잃은 것 같은 부재감으로 가득차지 않을까? (줄리언 반스는 그의 아내가 자기 심장의 생명이라고 했다.)

내년에 강릉으로 옮길까 한다.

내년에는 논에 들렀다가 오는 길에 잔뜩 주워 먹는 산딸기도, 집 옆의 우물도, 마을 회관에서 매일 점심을 먹는 겨울도, 장구지 아이(새댁)란 호칭도, 길가에 지천인 인동초와 달맞이 꽃도, 한적골 가는 도중에 있는 원시림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콩알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응? 지후야.


요즘 머릿속에 비 생각이 가득차 있어서 '비'가 '지후'를 밀어내려고 한다. 걱정이다. 그러니 비여 온몸을 열고 춤을 추며 오라. 너라도 내려야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이 조금은 깨끗해 질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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