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광주에 다녀왔다. 종자기능사 실기시험을 봤다. 접은 잘 못했지만 37시간 짜리 대장정이었던 만큼 합격했으면 좋겠다. 시험이 끝나고 터미널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올해 60이라는 기사 아저씨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혼자서 옛 추억에 젖어서 먹을 것이 많지 않던 시절의 추억을 얘기했다. 어머니가 잘라 놓은 머리칼을 엿이랑 바꿔 먹고 두들겨 맞았던 일, 두부가 귀하던 시절이라 된장에 호박만 넣고 끓인 된장 국이 맛있었던 일, 우물안에 보관했던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그 김치랑 고추장만 넣고 비빈 밥을 누나 것까지 먹고 누나에게 미안했던 일, 집에 키우던 닭의 달걀을 훔쳐서 동네 점방에서 '뽀빠이'랑 바꿔 먹었던 일, 초코파이를 낱봉으로 구입해서 초콜렛이 다 녹을 때까지 쭉쭉 빨아 먹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얘기 중간에 그 시절에는 먹을 것이 귀했응게, 그렇지만 먹고 싶은 것은 다 먹고 살았지라.라고 했다. 지후가 그 부분을 좋아했다. 지금처럼 외식의 가짓수가 많지 않아도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은데, 돈이 없는 것 보다는 어머니의 머리칼을 훔쳐서라도 먹고 싶은 것은 다 먹고 사는 것이 더 즐거운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광주에 내려갈 때는 일산 화정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는데, 차 시간이 많이 남았길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 내 머리 잘라주신 아주머니가 멋 부리고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나봐요.라고 묻길래, 그런것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나한테 학생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옳지 않다. 나는 중년 남자다. 각설하고 어려서부터 나는 멋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농촌 생활을 좋아하고 동경하는지도 모른다.

 집에 오기 전에 버스에 내려서 슈퍼엘 들렀다. 담배랑 바나나 우유를 사면서 슈퍼 안을 훑었는데, 바닥에 놓인 고구마 박스가 보였다. 일찍 심은 것들은 벌써 나오는 모양이다. 주인아저씨네가 고구마를 많이 심었으니 올 겨울에 고구마 실컷 먹을 수 있겠다. 완전 거지근성이잖아. 싫지 않다. 내년에는 심어서 먹자. 많이.

 집에 와서는 주인아저씨한테 전기요금을 드렸다. 실은 전기요금을 핑계로 뭔가 얻어 먹으려 갔던 것이었는데, 마침 숭어회를 드시고 계셨다. 숭어 모래집까지 얻어 먹고 마무리로 국수를 먹었다. 윗배까지 부르다. 광주에 시험보러 다녀왔다고 했더니 아저씨가 뭐든 열심히 하라고 하신다. 그러시더니 내년에 다른데도 옮길거면 전세금 빼줄테니 미리 얘기하라고 하신다. 운신의 폭이 커졌다는 점에서 다행이다.

 주말에 지후랑 광주에서 데이트를 한 덕분에 - 또는 이틀을 쉰 덕분에 - 다음주에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기분이 든다. 당분간 퇴근 후에는 기타치고 책 읽으면서 놀아야겠다.

 

 광주에서 올라오는 버스에서는 이성복의 '남해 금산'을 강화로 오는 버스에서는 김연수의 새 장편을 읽었다. 김연수는 약간 천재과인 것 같다. 예전에 이대에서 일할 때 느낀거지만 천재는 실제로 존재한다. 질투가 난다. 이성복의 시집을 오랜만에 꺼내 읽었는데, 중간중간 접힌 부분이 많다는 점이 내가 좋아하는 시집이라는 점을 상기키셔준다.

 

 시집의 self-title이 마지막 시로 실린 특이한 시집이다.

 

 남해 금산    - 이성복 -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

 "나의 엄마는 정지은이고, 나의 아빠는 정재성인데, 두 사람은 남매였대."

 그리고 나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섰다. 나는 힘든 짐을 들었다가 내려놓은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다가 유이치에게 찬물을 좀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갑작스러운 말들에 어안이 벙벙해진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일단 시키는 대로 찬물을 가지러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밤하늘에서는 불꽃이 연신 터졌고, 필리핀 2인조는 노래를 계속 불렀다. 너는 겨우 열일곱 살, 젊고 귀여운 댄싱 퀸, 댄싱 퀸, 탬버린 박자를 느껴봐, 너는 춤출 수 있어. 유이치가 다시 갑판으로 올라왔을 때는 불꽃놀이가 모두 끝나 있었고 배의 조명은 다시 들어왔으나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 p.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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